"혼미한 시대에는 시가 길어진다?"

긴 시가 유행이다.

최근 창간된 문학지 "새로운"에는 4페이지 분량이나 되는 긴 시가
등장한다.

박형준씨의 "L을 위하여"라는 작품이다.

이를 시집 판본으로 옮기면 무려 6페이지짜리다.

1행에 30자씩 90행(2천7백자), 2백자 원고지로 13장에 달한다.

함께 실린 그의 또 다른 작품 "뱀"도 73행.

둘다 행을 가르지 않고 풀어 쓴 산문시다.

같은 지면의 서동욱 김소연 김철식 이명랑 고나리씨 작품도 길기는
마찬가지.

66~73년생인 이들은 문단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중인 젊은 시인이다.

"문학동네" 봄호에 실린 유강희씨의 "위봉폭포"와 "문예중앙"에 소개된
정상현씨의 "교통법규 위반" "구리에 살며", 박용하씨의 "그린란드를
그리워하다", "세계의 문학"에 실린 배용제씨의 "폐쇄회로"도 길다.

시 한편의 길이는 보통 10~20행, 길어야 30행 내외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길어졌을까.

원인은 대략 세가지.

첫째 어지러운 사회상의 반영이다.

전망없는 시대, 세기말의 모호한 현실에서 좌표를 잃고 방황하는
젊은이들의 불안감이 투영돼 있다는 분석이다.

사회가 급변하면서 인간관계와 환경이 복잡해진 건 말할 것도 없고
대상과의 교감도 다층화됐기 때문.

서구에서도 근대 산업사회 이후 시가 급속히 길어졌다.

게다가 "외부의 적"이 뚜렷했던 80년대와 달리 "과녁"이 없어져버린
90년대에는 시인들이 관심을 내부세계로 돌리면서 의식의 흐름이나
자아의 분열등이 새로운 주제로 떠올랐다.

둘째는 "정치적 혼란기에 시가 길어진다"는 일반론이다.

유신시대의 얼음장같은 상황에서 양성우의 "겨울 공화국"이나 김지하의
"오적"이 나왔고 80년대의 난세에 김정환의 "황색 예수전", 백무산의
"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 김준태의 "지리산 여자"등이 출현했다.

그러나 80년대에는 "할 말"이 많았고 시인의 역할도 그만큼 컸지만
지금은 자기진술이나 독백시가 주류를 이룬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는 컴퓨터와 영상문화에 익숙한 이른바 뉴미디어세대의 글쓰기에서
비롯된 것.

최근 일본의 신세대 시인들도 긴 시를 선호한다.

나카무라 가즈에의 "탈린재방"이라는 작품은 65행에 달하고 오오시마
마사도시의 "불가사리"도 39행이나 된다.

하지만 이들의 작품은 우리보다 "비교적 정제된" 형태를 띠고 있다.

조사나 부사, 직유법이 적고 상징과 은유로 행간을 채우며 축약된
이미지를 담고 있다.

중진시인 정진규씨는 "시가 길어지는 것은 일상적 삶과 체험에 대한
진술이 많아지고 생각의 갈래가 엇갈리는데 따른 현상이며, 따라서 이미지
탐색도 우회화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리듬이나 메시지를 응축해 전달하기보다 풀어서 설명하려 든다는
지적이다.

문학평론가 유종호(연세대교수)씨는 "동양에서는 전통적으로 짧은 절구가
기본을 이뤘는데 이같은 기조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면서 "눈길을 끌고
차별화하려는 시도는 좋지만 무작정 길거나 산문화하는 경향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충고했다.

< 고두현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3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