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최고의 패션거리 뉴욕 매디슨가 66번지에서 17년째 숍 운영.

95년 5월 뉴욕 아시아아메리카연맹 선정 우수 아시아계디자이너.

94년 1월 까다롭기로 이름난 뉴욕컬렉션 정회원 진입, 6번의 컬렉션
개최.

뉴욕패션계 이너서클 (Inner circle.배타적인 내부조직)의 회원.

미국의 대표적인 동양계 디자이너중 한사람으로 꼽히는 디자이너
트로아조씨(56)의 이력이다.

그는 미국 패션시장을 두드린 여러명의 한국디자이너중 거의 유일하게
"살아 남은" 사람이다.

그의 성공은 그래서 더욱 빛난다.

"트로아조" 의상을 버그도프굿맨 등 유명 백화점에서 수트 1벌에
1천~2천5백달러 (80만~200만원)에 팔만큼 자리잡은 지금, 그는 제2의
도약을 꿈꾸고 있다.

"그동안 까다로운 미국시장의 검증을 거쳤습니다.

"편안하면서도 여성의 아름다움을 잘 드러낸다"는 평도 얻었죠.

한걸음 더 나아가려면 오트쿠튀르 (고급 맞춤복)가 필수적이에요.

다행히 아들 한규의 오트쿠튀르 디자인이 호평받아 낙관적입니다.

올해부터는 고급의상에 승부를 걸겠습니다"

조씨의 아들 송한규씨는 뉴욕 주립대에서 정치학을 전공했으나 패션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못해 뒤늦게 어머니의 뒤를 이었다.

2년전부터 조씨와 함께 작업중인 송씨는 우아한 드레스를 좋아해
단아하고 절제된 정장을 즐겨 만드는 어머니와 좋은 콤비를 이루고
있다.

트로아조씨는 "록음악 등 대중예술을 모두 좋아하는 아들 덕에 젊은
감각을 유지할수 있어 너무 좋다"고 덧붙였다.

트로아조 일가를 아는 사람들은 이들을 "성공적인 가족경영그룹"이라고
부른다.

맏딸 송지은씨는 미파슨즈에서 텍스타일과 디자인을 전공한뒤
스타일리스트로 일하고 한규씨는 디자인, 막내딸 지영씨는 홍보와 경영을
맡고 있다.

이탈리아 브랜드의 대부분이 바람직한 가족 경영의 선례를 보여온 만큼
패션계에서는 이들의 성공을 점치고 있다.

그가 패션계에 입문한 것은 62년.

국제복장학원을 졸업한뒤 명동에 "트로아조" 의상실을 열었으며 10년간
맞춤복을 만들다가 72년 기성복으로 전환했다.

"5년간 무척 고전했어요.

사이즈 편차를 맞추지 못해서죠.

개개인의 체형을 모두 만족시켜야 하는데 그게 잘 안돼니 재고가
쌓이고..."

그래서 생각한 것이 고급 기성복이 발달한 프랑스에서 배우는 것.

77~78년 5~6차례 파리로 날아가 보름씩 체류하며 유명 맞춤복사에서
사이즈를 공부했다.

미국 진출도 학업때문에 시작됐다.

80년에 2개월 예정으로 뉴욕으로 공부하러 갔다가 유망하다는 관계자들의
말에 눌러앉아 오늘에 이르렀다는 설명이다.

물론 쉽지는 않았다.

그 자신 FIT에서 광고와 판촉을 공부했고 "오로지 패션만 생각하며"
지냈다.

84년 뉴욕 타임즈에 피에르 가르댕과 나란히 기사가 실렸으며
트럼프타워에 제2매장을 열어 도날드 트럼프의 부인 이바나 트럼프 등
명사를 고객으로 얻었다.

96년 봄부터는 유명패션지 "W"에 광고를 싣고 있으며 2월에 열 뉴욕매장
리오픈파티는 패션지 "바자"가 도맡아 준비중이다.

일본회사로부터 스폰서 역할을 하겠다는 제의도 받았다.

"뉴욕컬렉션회원으로 가입하면서 비로소 "나는 이제 단순한 옷장사가
아니고 디자이너"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 멋모르고 앞만 향해 달렸다면 이제 호흡을 가다듬고
아티스트로서의 길을 찾아야죠"

그는 최근 국내 매장을 15개에서 7개로 줄였다.

물량과 세일을 줄이고 질을 높이기 위해서다.

"다소 소홀했던 국내활동도 다시 가다듬어 명실상부한 "한국디자이너"의
모습을 보이겠다"는 것이 97년 그의 다짐이다.

< 조정애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월 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