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오늘 아름다운 도적이 되고 싶네
"그해 그겨울 그집"에 몰래 들어가
그대가 먹다 남은 고구마 마저 먹고
싱건지 국물 마시고
나도 잠이 오지 않아 얼마나 환한지
환히 열려오는 논두렁 따라
논두렁 따라 무작정 걷고 싶네
그러다 봄빛 창창한 처녀 풀밭을 지나
담양 궁산리 무너진 돌담장까지 걸어 가
"저 씻나랏 담그는 풍경"도 훔쳐보다
그래, 그래 고개 끄덕거려 희망이란 것도
때로는 필요하지 구겨버린 희망을
반듯하게 펴들고 오고 싶네
훔쳐온 것 다 그냥 빈 들에 놔두고 멍든 내 서른아홉
몸뚱이 푸르게 울며 오고 싶네
누구 와서 내 가진 것 훔쳐가면 그도 또한
아름다운 이 지상의
도적이 되리니, 오, 땅 밟고 걸어도,
땅이 자꾸 그리워지는 이 한나절

- ''현대시'' 8월호에서 -


(한국경제신문 1996년 8월 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