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hutterstock
/ shutterstock
생명과학과 뇌과학으로 인간이 마침내, 깊고 신비로운 영역에 도달한 것 같다. 우리는 생로병사뿐만 아니라 인지 및 정서 등 인간의 근원적인 작동원리를 관찰하기에 이르렀다. 인간의 삶에 대한 철학의 근본적인 질문들에 과학이 와 닿은 것이다. 바이오 정책 역시 같은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이번 기고문에서는 바이오 정책의 철학적 토대와 대안을 논의해보고자 한다. 먼저 합성생물학의 표류 사례를 중심으로 바이오 과학기술에 대한 철학의 부재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살펴보자. 논의의 필요성에 좋은 예가 될 것이다.

합성생물학, 가능성만큼 큰 위험성

합성생물학은 그간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인공생명체를 제작·합성하거나 기존 생명체를 모방하고 생명체의 특성을 재설계하는 등의 과학기술을 의미한다. 잠재력이 높은 기술이지만 기술 오용의 위험성과 결과물의 비가시성은 부정적인 상상력을 자극한다. 합성생물학으로 바이러스의 숙주를 변형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나 바이오 테러를 위한 무기화 가능성 등이 이미 제시됐다.

게다가 합성생물학 부품과 합성법이 인터넷을 통해 공유될 만큼 높아진 접근의 용이성이나 유전자 편집 기술로 맞춤형 아기를 탄생시키는 등의 윤리성 문제는 기술의 위험성에 대한 걱정을 배가했다. 이에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 등 7개국 18명의 과학자는 ‘유전자 편집 모라토리엄’을 선언하는 등 과학계의 우려도 이어졌다.

이처럼 합성생물학은 기술 발전과 윤리적·사회적 수용성의 논란 속에서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표류 중이다. 바이오 과학기술정책에 대한 철학의 부재에 따른 결과다. 막연한 두려움이나 공포감만으로는 표류를 끝내지 못할 것이다. 객관적 근거를 통한 합리적 판단과 방향성에 대한 모니터링 등 대안 마련이 필요하다. 그리고 바이오 정책의 철학적 토대가 그 대안의 조합의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이다.
[김태윤의 정책프리즘] 신중한 경계

과학기술, 자동화 넘어 지능화로

바이오 과학기술의 발전과 보급은 논란 속에서도 분명히 중단되지 않고 계속될 것이다. 역사상 몇 차례 산업혁명의 경험에서 인류의 선택은 그러했다. 4차 산업혁명도 어느새 일상적인 논제가 되었다. 다양한 산업 영역이 단순 자동화를 넘어 지능화까지 전개되면서 인력 대체의 위기도 비숙련 육체노동자뿐만 아니라 숙련직, 전문직까지 스며들었다.

자연스레 변화의 부작용도 있다. 대체가 비교적 쉬운 단순노동자와 자본주의 논리상 이익이 높은 영역부터 빠르게 인력 대체가 이루어지면서 양극화가 심화됐다. 법률 및 의료서비스 등 인간의 명운을 결 정짓는 직업마저 기술의 손에 맡겨야 하는 불안감도 커졌다. 그럼에도 과학기술 발전의 흐름은 멈추지 않고 있다. 물리학의 작용 반응처럼 다른 힘이 없는 한 바이오 과학기술의 발전은 계속될 것이다. 폭주할 것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 수도 있다.

‘사람 중심의 과학’이란

한편 반작용의 힘을 다듬어 과학기술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방법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그리고 수많은 견해가 상충할 논의의 기준이 바로 ‘사람 중심의 과학’이다. 사람 중심의 과학은 말 그대로 사람에 그 의의가 있다. 과학기술 연구, 기술 편익의 향유뿐만 아니라 예기치 못한 부작용에 대한 감내까지도 사람의 몫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 중심의 과학은 과학기술 연구 및 개발 과정에서 좋은 의도나 바람직한 목적의식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반향까지도 포용한다. 다양한 반향을 사전에 대비하는 사전주의적 접근이 요구되고, 사회문화적 감수성과의 결합도 강조된다.

‘People, not project(과제가 아닌 사람에 대한 지원)’, 1953년 설립 이후 다수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미국 하워드휴즈의학연구소(HHMI)가 연구자를 지원하는 기본 철학이다. 사람 중심의 과학에 대해서 역시 강조하고 있다. 바이오 정책에서도 사람 중심으로, 그 통제와 관리 기법에 접근해야 한다.

사전주의와 행동주의

한편 과학기술 연구 및 개발과 관련해 사회적·윤리적 고려 혹은 보다 구체적으로 규제 원칙의 논의에서 흔히 ‘사전주의(precautionary)’와 ‘행동우선 (pro-action)’ 두 접근이 대립적으로 제시된다.

사전주의 접근이란 흔히 과학기술 연구에 내재된 위험을 예견해 그 위험이 실현되지 않도록 확실한 예방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전주의 원칙은 원래 유엔이 환경오염처럼 국제적인 공조가 필요한 사안에 대해 적절한 대응책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유전자변형작물(GMO)이 본격적으로 상업화된 이후, 이에 대한 국제적 우려를 반영해 2003년 9월에 ‘바이오안전성* 의정서’가 국제적으로 발효됐다. 의정서는 유전자변형생물체(LMO)의 국가 간 이동을 규제하는 최초의 국제협약이며, LMO의 안전성에 대한 과학적 불확실성이 LMO 규제의 장애요인이 돼서는 안 된다는 ‘사전주의 원칙’을 국제 규범화한 점에서 의의가 크다.

반면 행동우선 접근은 과학기술 연구개발이 가져다주는 혜택을 고려할 때 그로부터 발생되는 위험은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단 과학기술 연구를 수행한 후 부정적 파급효과를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해서 그에 대한 대비책을 세워야 한다는 입장이다. 위험은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이해에 근거해서 정량적으로 평가할 수 있으므로 비용과 편익의 비례규칙을 적용해 위험을 관리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1970년대 미국 환경청을 비롯한 행정기관에서는 위험평가기법과 각종 가이드라인을 개발했고, 현재 오염 통제나 화학물질 관리 등의 분야에서 위험평가제도가 운영되고 있다.

*바이오안전성
바이오안전성이란 생명공학기술이 환경 또는 인체에 미칠 수 있는 잠재적 위해성을 최소화하기 위한 법률, 정책, 절차 등 모든 제도 및 수단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바이오 분야의 경우 위험을 판단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위해성을 최소화하고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한 안전장치로서 바이오안전성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이는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각국의 능력에 따라 사전주의 접근 방식이 광범위하게 적용돼야 하며, 심각한 또는 회복 불가능한 피해의 우려가 있을 경우, 과학적 불확실성이 환경 악화를 방지하기 위해 비용 효과적인 조치를 지연시키는 구실로 이용돼서는 안 된다”는 리우선언의 제15원칙을 반영한 것이다.
1992년 유엔환경개발회의(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114개국 정상이 모여 개최한 지구환경회담)에서 채택되었던 ‘리우선언’은 환경적으로 건전하고 지속 가능한 개발(ESSD)을 실현하기 위해 1972년 ‘스톡홀름 선언’을 확대하고 강화한 것으로, 국가들에 의해 채택된 독립적이고 가장 중요한 국제문서다.

가역성을 기준으로 한 ‘신중한 경계’

과학기술 연구개발에 내재된 위험의 규모와 발생 시기 등을 예견할 수 있다면 정부가 그에 필요한 예방조치로서 정책을 수행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합성생물학 등 이머징 기술로 분류되는 최신 바이오 기술은 기술개발에 수반될 것으로 예상되는 위험 및 부작용의 규모, 발생 개연성 등에 대한 과학적 근거를 확증하기 어렵다.

사전주의 접근에 따르면 위험요소를 예측할 수 없으므로 기술의 연구개발을 제한해야 하고, 행동우선 접근에 의하면 기술개발에 따른 무분별한 부작용을 감수할 각오를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2010년 미국의 ‘생명윤리 이슈 연구에 관한 대통령자문위원회(PCSBI)’ 보고서에서는 불확실성을 이유로 연구개발을 무조건 금지하기보다는 신중한 경계(prudent vigilance)로 잠재적 혜택과 위험을 주기적으로 평가하도록 권고한 바 있다.

이에 더해 가역성이 매우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될 것이라고 본다. 정부가 위험에 대한 대응을 사전적으로 모색한 후에 발생 가능할 것으로 예상되는 위험이 가역적이라고 판단된다면 연구개발 등을 허용하는 것이다.

예상된 위험이 가역적이라면 해당 연구개발을 중지 하거나 철회하는 경우에는 위험이 실질적으로 발현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가역성과 결합된 ‘신중한 경계’가 바이오 정책의 철학 또는 원칙이 돼야 한다고 믿는다. 적극적으로 과학기술을 연구개발하고 산업화하지만 주기적이며 신중하고 위험회피적인 경계로 위험을 감지, 모니터링, 예측, 평가, 측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와 민간이 위험동반자가 되어야 할 것

또한 정부는 위험 발생에 대한 책임이 연구개발자 개인에게 전가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지금처럼 위험한 일은 민간이 감행하게 하고 팔짱 끼고 있다가 사고나 위기가 발생하면 처벌하는 식으로는 절대로 성과를 낼 수 없다.

정부가 민간과 함께 위험을 함께 지는 위험동반자가 되어야 도전적인 연구와 투자가 가능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우선 과감한 투자를 통해 위험을 방제할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 예를 들면 나노팹의 사례처럼 새로운 기술의 연구·측정·평가·시험을 허용하는 공간을 구축하고, 그 공간의 완벽한 물리적·제도적·도덕적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규제 샌드박스 사례와 같이 규제나 사회의 관행 등의 적용을 일정기간 유예하는 제도적·행태적 시스템을 개발해서 연구자와 개발자들이 걱정 없이 과감한 도전을 감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렇게 파트너십이 구축되면 과학기술적 차원의 위험에 적절한 관리 및 대응과 함께 과학기술적 발전을 함께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위험을 두려워해서 능력을 구축하지 않으면 위험이 닥쳤을 때 대처하지도 못한다. 능력이 있어야 위험도 관리할 수 있다.

[김태윤의 정책프리즘] 신중한 경계
김태윤 한양대 행정학과·과학기술정책학과 교수

서울대 경영학과에서 학사를,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에서 정책학 석사와 박사를 취득했다. 국회 예산정책처에서 사업평가국장으로 근무했고, 대통령직속 규제개혁위원회 위원과 간사위원을 역임했다. 한국규제학회 회장을 지냈으며 행정, 경영, 경제를 두루 섭렵한 석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