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정국에 묻힌 스타트업들의 호소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통과된 지난 9일. 온 국민의 관심이 탄핵과 최순실 국정농단에만 집중돼 있던 이날, 몇몇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 대표들은 청와대로 향했다. 시위를 하러 간 게 아니었다. 규제를 풀어달라고 읍소하기 위해서였다.

이날 현대원 청와대 미래전략수석 주재로 열린 회의에서는 개인 간(P2P) 금융 규제(본지 11월30일자 A17면 참조), 차량 공유 서비스 규제, 근접무선통신(NFC)을 활용한 비대면 인증 규제 등 세 가지 안건이 논의됐다. P2P 금융업체들은 저축은행보다 싼 금리로 신용등급 4~6등급자에게 대출해 주고 있다. 하지만 최근 금융위원회가 “자기자본으로 대출하면 안 된다”는 규제를 내놓으면서 대출 고객이 크게 줄어들 위기에 처해 있다.
탄핵 정국에 묻힌 스타트업들의 호소
차량 공유 서비스는 현행법상 ‘렌터카업’으로 등록돼 있어 사무실과 차고 면적 등을 의무적으로 확보해야 한다. ‘무인서비스’라는 본래의 취지를 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NFC 비대면 인증은 스마트폰을 갖다 대기만 해도 본인 인증이 되는 편리한 서비스지만, 이중 삼중의 규제와 통신사의 견제에 막혀 있다.

모두 스타트업들이 새롭게 만든 비즈니스 영역이고, 소비자도 큰 혜택을 보고 있지만 규제 장벽에 가로막혀 제대로 된 서비스가 힘든 분야다. 이날 간담회에는 각 분야 스타트업 대표와 관련 부처 담당자들이 참석해 규제에 대해 치열한 논쟁을 벌인 것으로 전해졌다.

한 스타트업 대표는 “국정농단 사태는 안타깝지만 그 와중에 복지부동하고 있는 정부가 더 큰일”이라며 “정부도 언론도 탄핵 관련 사안에만 집중하느라 경제, 특히 우리 같은 작은 스타트업의 애로에는 관심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푸념했다.

다행히 이날 간담회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현 수석은 스타트업의 입장에서 가능한 한 규제를 풀어야 한다는 쪽으로 회의를 열었다고 한 참석자는 전했다. P2P 금융과 관련한 규제에 대해서는 담당부처인 금융위원회에 공식적으로 재검토를 요청하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들의 분노와 관심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 집중돼 있지만, 산업계에서는 “점점 침체되고 있는 경제가 더 큰 문제”라고 입을 모은다. 대기업은 글로벌 경기침체, 중국의 견제, 미국 금리 인상 등 겹겹의 악재 속에 총수의 국정농단 연루 의혹에 대처하느라 신음하고 있다. 단기 악재가 아니더라도 자율주행차, 공유경제 등 새로운 경영 패러다임이 하루가 멀다 하고 등장하는 환경 속에서 굴뚝산업 중심의 대기업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젊고 열정 있는 인재들이 새로운 비즈니스를 만들고 고용을 창출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줘야 한다. 그러나 포지티브(원칙금지, 예외허용) 규제 시스템을 가진 한국에서 정부가 규제 혁파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스타트업이 만든 참신한 아이디어는 꽃도 피우지 못하고 시들어 버릴 우려가 크다. 국정농단에 대한 수사와는 별개로 이제는 다시 정부가 기업들이 일할 수 있도록 도울 때라는 생각이 든다.

남윤선 IT과학부 기자 inkling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