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도 PC는 ‘수리 중’ > 울 공릉동의 한 초등학교에서 5학년 학생들이 실과 수업 시간에 PC 활용법을 배우고 있다. 컴퓨터실습실 곳곳에는 고장 난 PC들이 놓여 있다. 정동헌 기자 dhchung@hankyung.com
< 오늘도 PC는 ‘수리 중’ > 울 공릉동의 한 초등학교에서 5학년 학생들이 실과 수업 시간에 PC 활용법을 배우고 있다. 컴퓨터실습실 곳곳에는 고장 난 PC들이 놓여 있다. 정동헌 기자 dhchung@hankyung.com
“가고 싶은 곳, 하고 싶은 일 등을 넣어서 여행 계획서를 만들어보세요.”

지난 8일 서울 공릉동에 있는 한 초등학교의 컴퓨터 실습실. 5학년 학생들이 PC 활용수업을 듣고 있다. 군데군데 ‘고장 수리 중’이라는 종이가 붙은 PC 사이로 학생들이 교사의 지시에 따라 옆자리 친구와 PC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수업 내용은 문서프로그램으로 여행계획서를 만드는 것.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던 김모군은 “2학년 때부터 비슷한 수업을 받아와 별로 재미가 없다”며 “PC 수업은 타자연습이나 인터넷 검색으로 시간을 보낼 때가 많다”고 말했다.

한국의 초등학교 현장에서 컴퓨터 수업은 ‘시간 때우기’로 전락한 지 오래다. 대부분 문서작성 등 PC 활용교육에 치우쳐 소프트웨어(SW) 코딩을 가르친다는 건 꿈도 못 꾼다.

학교 PC 대부분 낡아

국내 초등학교에서 컴퓨터나 SW 관련 수업은 실과과목의 교과과정에 포함돼 있다. 하지만 한 학기 실과 수업시간에서 컴퓨터 교육시간은 네 시간가량이다. 그나마도 설문조사나 타자연습을 시키며 관련 시간을 때우고 있다는 게 교사들의 실토다. 한 초등학교에서 정보부장을 맡은 교사는 “1년에 8~9시간 수업을 하면서 뭘 가르칠 수 있겠느냐”며 “사실상 안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부실한 교육인프라도 문제다. 교육정보화백서에 따르면 학교에 설치된 PC 한 대당 학생 수는 2013년 기준 초등학교 4.8명, 중학교 5.5명, 고등학교 4명이다. 표면상 수치는 나쁘지 않다. 하지만 문제는 관리가 엉망이라는 것. 현재 대부분의 초등학교에는 컴퓨터 실습실이 마련돼 있다. 그러나 실과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이용하지 않는다. 외주 업체가 운영하는 방과후학교에서만 1주일에 한 시간 정도 활용할 뿐이다. 그러다 보니 설치된 PC가 제대로 관리되지 못한다. 한 초등학교 교사는 “실습실의 PC 중 상당수가 바이러스에 감염돼 있다”며 “속도가 느린 노후 컴퓨터가 많아 수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때도 있다”고 말했다. 또 “교사들도 컴퓨터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아 수업을 등한시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중학교도 마찬가지다. 경기 안양의 한 중학교 정보담당교사는 “컴퓨터 실습실에 있는 PC가 대부분 2006~2007년식”이라며 “상대적으로 입시와 관련이 없는 과목이다 보니 지원이 열악하다”고 토로했다.

정보담당 교사 설자리 없어

학생들에게 SW 교육을 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이를 가르칠 수 있는 교사다. 하지만 입시 논리에 밀려 정보과목 교사들도 설자리를 잃고 있다. 정부는 정보교과가 신설된 2000년엔 임용고시로만 300여명의 정보과목 교사를 선발했다. 하지만 2012년부터는 정보과목 교사를 한 명도 뽑지 않고 있다. 정보 관련 과목을 선택하는 학교가 계속 줄어들고 있어서다. 그러다 보니 기존 정보과목 교사들도 컴퓨터가 아닌 다른 과목을 가르치는 경우가 많다.

경기 용인에서 지난해 신설된 중학교 8곳 중 정보과목을 선택한 학교는 한 곳도 없었다. 경기 안양에 있는 한 고등학교 정보담당 교사는 “전근 발령을 받아 학교에 와봤더니 정보과목을 가르치지 않아 창의적 체험활동 시간에 다른 과목을 가르치고 있다”고 말했다. 경기 과천에 있는 한 중학교 교사도 “학교에서 수업시간을 조정할 때 가장 편하게 줄일 수 있는 게 정보과목 같은 선택과목”이라며 “유능한 정보담당 교사들도 과목이 없어지면서 수학, 과학으로 전공을 바꾸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최근 3년간 안양·과천지역만 해도 정보 관련 교사 수는 절반 이하로 줄었다.

중학생 이상만 되면 학생들도 정보과목에 무관심해진다는 게 교사들의 지적이다. 컴퓨터나 프로그래밍의 기본원리 등을 가르치려고 해도 당장 시험에 필요한 과목이 아니기 때문에 학생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다.

정부 ‘스마트스쿨 전면 재검토’

SW 교육에 무책임한 정부도 문제다. 교육부는 최근 정보기술(IT)을 교육 환경 전반에 도입하려던 스마트스쿨 프로젝트를 세종시 일부에만 적용한 뒤 전면 재검토하기로 했다. 스마트교육을 위한 디지털 콘텐츠가 부족하다는 이유다. 한 고등학교 교사는 “관심 있는 학생들의 재능을 길러주기 위해서라도 SW 교육에 정규 수업시간이 배정돼야 한다”며 “지금 같은 교육환경에서 IT 인재를 조기 발굴하고 육성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 코딩(coding)

컴퓨터 프로그래밍의 다른 말. C언어 자바 파이선 등 컴퓨터 언어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코딩을 배우면 논리력 창의력 문제해결력을 키울 수 있다. 영국 정부는 올 가을학기부터 초·중·고교에서 코딩을 필수과목으로 가르치도록 했다.

임기훈 기자 shagg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