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북미 TV시장 랭킹을 살펴보면 생소한 기업의 이름이 눈에 띈다. 대만계 미국인 윌리엄 왕이 2002년 세운 '비지오'다. 이 회사는 LCD TV 부문에서 수량 기준 18.7%의 점유율을 기록,글로벌 업계 1위인 삼성전자(17.7%)를 앞질렀다. 대만 PC업체 에이서는 1분기 시장조사기관 가트너가 발표한 세계 PC 시장 순위에서 HP(18.2%)에 이어 2위에 올랐다. 이 회사의 점유율은 14.2%에 달한다.

이 두 회사가 짧은 시간에 시장 점유율을 끌어올린 배경은 제조 원가에 있다. 에이서는 생산을 100% 아웃소싱하고 브랜드 관리와 판매만 전담하는 방법으로 원가를 낮췄다. 비지오 역시 제조 부문이 없다. 중국과 대만 업체에서 공급받은 부품을 암트란 등 대만 위탁생산업체에 보내 조립한다. 제품 유통도 자체 판매망 없이 코스트코와 같은 대형마트를 활용한다.

아이폰으로 세계 스마트폰 시장을 호령하고 있는 애플에서도 제조는 '찬밥'이다. 조립 전문 업체인 대만 훙하이가 애플이 만든 설계도에 따라 제품을 만든다. 핵심 역량만 남기고 나머지를 외부 전문기업에 위탁,가격 경쟁력을 갖춘다는 게 애플의 전략이다.

애플이나 비지오,에이서가 지향하는 이른바 '수평분업형 제조 모델'은 디지털시대의 산물로 꼽힌다. 제품 구성이 복잡하고 부품이나 소재 간 조율이 까다로웠던 아날로그 시대에는 제조현장의 섬세한 능력이 중요했다. 기업의 역량을 가늠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제조 능력이었던 만큼,이를 외부에 위탁하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디지털 시대에는 제품의 역량이 소프트웨어나 핵심 칩 한두 개에 의해 결정되는 경향이 강해졌다. 복잡한 조율 과정을 거쳐 선택했던 부품들도 대부분 표준화됐다. 인텔 CPU 칩의 사양이 같으면 브랜드에 상관없이 완제품 품질이 엇비슷한 PC가 대표적인 분야로 꼽힌다. 원가 절감을 위해 제조를 외부에 위탁하는 기업이 늘어난 배경이다.

삼성전자 현대 · 기아자동차 LG전자 등 국내 주요 제조업체들은 제조 아웃소싱 문제에 있어 무척 보수적이다. 제조를 중심으로 산업을 육성,이 분야 노하우를 탄탄하게 갖춘 만큼 굳이 외부의 힘을 빌릴 필요가 없다는 게 국내 업체들의 공통된 설명이다. 품질 안정성이 떨어지고 기술 유출 가능성을 배제하기 힘들다는 점도 제조 아웃소싱을 기피하는 이유 중 하나다.

최근 2~3년간은 애플,비지오 방식이 대세가 될 것이라는 예상이 우세했다. 가격 경쟁력 면에서 유리하다는 점 때문이었다. 하지만 도요타 혼다 등 외국계 기업 중국 생산공장 직원들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파업을 벌여 생산이 중단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저렴한 중국 노동력을 활용한 수평분업 모델이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중국 내 생산 아웃소싱 기업의 임금이 치솟으면 애플식 제조 모델은 한순간에 붕괴될 수도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감덕식 LG경제연구원 연구원은 "제조업이 과거만큼의 부가가치를 누리기는 힘들지만 지속 성장이 가능한 모델이라는 점은 분명하다"며 "한국 기업들이 제조 분야에서 쌓은 노하우를 버리고 애플식 제조 모델을 선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송형석 기자 clic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