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통신비 20% 인하를 내걸 때 이미 알아봤다. 요금인하를 싫어할 소비자는 아무도 없다. 당연히 정치적으로는 분명 환영받을 만한 약속이다. 정부가 무슨 근거로 20%란 수치를 꼭 찍어 내세웠는지는 알 길이 없다. 솔직히 소비자들은 이에 대해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다만, 정부가 그런 약속을 내세운 것은 통신업체들이 요금을 그만큼 내릴 여력이 있기 때문 아니겠느냐고 소비자들은 추측했을 것이다.

이 약속은 당시 '포퓰리즘'이란 비판에 직면했다. 그래서 대통령직 인수위는 경쟁촉진으로 요금이 인하되도록 하겠다고 물러섰다. 그후 잊혀지는 듯하더니 공정위의 한국소비자원이 불을 지폈다. 메릴린치 자료를 인용한 국가 간 요금비교가 그것이다. 그것은 소비자들로 하여금 우리나라 요금이 비싸다는 생각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곧이어 OECD의 통신요금 비교자료가 공개됐다. 소비자들의 심증은 더욱 굳어져갔다.

방통위는 국가 간 비교분석에 문제가 적지않다고 지적했다. 상당 부분 맞는 말이다. 그러나 먹혀들 리 없었다. 이미 20% 통신비 인하 약속을 했던 정부아니었던가. 소비자 눈엔 정부의 그런 지적이 자기모순이거나 업계를 대변하는 궁색한 변명으로 들렸을 것이다.

한마디로 자승자박(自繩自縛)이다. 이런 판에 청와대 미래기획위원회는 한 술 더 떴다. 위기상황이니만큼 서민과 중산층의 부담을 덜어주는 요금인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요금정책 위에 복지정책이 있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방통위에 던졌다. 사공들이 이렇게 많다.

국가 간 요금비교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게 아니어도 정보의 비대칭 상황에 놓여 있는 소비자와 업계 간 요금논란은 언제든 불거질 수 있다. 비싸다고 말하는 소비자를 탓할 것도,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업계를 탓할 것도 없다. 어쩌면 그것은 영원한 생리다.

정치권이 이 틈을 놓칠 리 없다. 요즘 여 · 야, 보수 · 진보할 것도 없이 목소리를 높인다. 모두 '친(親)서민'을 외친다. 눈치를 봐야 하는 통신업계는 마지못해 성의를 표시한다. 요금논쟁의 시작과 끝은 늘 이런 식이다.

논란이 거세자 정부는 말꼬리를 돌린다. 요금과 투자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그런 정부가 왜 무턱대고 20% 요금인하부터 들고 나왔던가. 정부는 또 요금만 볼 게 아니라 품질도 함께 따져야 한다고 말한다. 말은 맞다. 그러나 그걸 아는 정부가 그동안 제대로 된 국제비교 분석을 하지 않았다는 게 말이 되는가. 정부의 직무유기다.

정부는 앞으로 경쟁을 촉진하면서 정부가 해야 할 역할을 하겠다고 한다. 여기서 정부역할이란 강력한 행정지도,아니면 산하 연구기관의 입을 빌려 흘리는 요금변경명령권 부활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는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일이다. 요금인하가 안 되는 이유를 규제가 풀린 단말기보조금 탓으로 돌리기도 하지만 조삼모사(朝三暮四)가 따로 없다.

정부는 경쟁촉진을 통한 요금인하는 시간이 걸린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변명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정부는 경쟁을 제대로 촉진한 적이 없다고 하는 게 맞다. 왜냐하면 정부가 정말 경쟁을 제대로 촉진했다면 당연히 요금은 내려가게 돼 있고, 소비자 선택폭은 커지게 돼 있기 때문이다. 혹여 이 정부는 경쟁을 촉진할 의지도,그럴 능력도 없는 게 아닌가.

안현실 <논설위원ㆍ경영과학博 a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