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컴퓨터 시장의 화두는 단연 넷북이다. 올 1분기에만 전 세계에서 600만대 이상이 팔리며 전체 노트북 시장의 20% 이상을 잠식했다. 하지만 컴퓨터 업계는 넷북 열풍에 만족하지 않는 모양새다. 좀 더 휴대하기 편하고, 스마트폰이 자랑하는 기능들을 흡수한 새로운 개념의 디지털 기기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휴대폰용 반도체 제조업체 퀄컴은 최근 '스마트북'이라는 디지털 기기와 스마트북용 칩셋인 '스냅드래곤'을 공개했다. 스마트북은 스마트폰과 넷북의 합성어로 이 두 가지 제품 사이에 존재하는 카테고리다. 휴대폰 업체가 넷북 시장을 공략하기 시작한 형국이다.

스마트북은 인터넷을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을 살리면서 기존 노트북에서 불가능한 강력한 이동성과 스마트폰이 가지지 못한 물리적인 편리함을 동시에 제공해준다. 스마트폰보다 더 빠르면서도 멀티미디어를 즐기기 적합한 그래픽 처리 기능과 상대적으로 큰 화면, GPS 내비게이션 기능 내장 등 부가 기능이 그것이다. 또 스마트북은 기존 노트북이나 넷북이 이용하던 블루투스(bluetooth)나 와이파이(WiFi)뿐만 아니라 휴대폰이 이용하고 있는 3세대 이동통신(WCDMA)이나 와이맥스(WiMax) 등에도 접속 가능하다. 부팅시간이 필요없어 거의 즉각적인 사용이 가능할 뿐더러 초저전력 설계로 배터리 작동시간이 넷북의 2배인 10시간으로 늘었다.

마크 프란켈 퀄컴 부사장은 지난 5월 열린 대만 IT박람회 '컴퓨덱스 2009'에서 "스마트북을 통해 늘 인터넷에 연결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목표"라며 "이는 자동으로 소프트웨어 업데이트가 이뤄지며,매우 휴대가 간편하고,휴대폰처럼 오래 지속되는 모델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스냅드래곤 칩을 이용한 제품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도시바는 기기 결함으로 판매를 중단한 상태이기는 하지만 지난달 20일 1㎓ 스냅드래곤 칩을 이용한 스마트폰 'T-01A'를 선보였다. 에이서 · 삼성 · LG · HTC · 아수스 등 15개 업체가 스냅드래곤 기반 스마트폰이나 스마트북 개발에 참여하고 있다. 퀄컴은 300달러 안팎의 가격을 유지해 넷북보다 저렴하면서도 어느 정도 만족할 만한 성능을 지닌 기기로 스마트북을 포지셔닝할 계획이다.

아톰칩으로 넷북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인텔도 공세에 나서고 있다. 인텔은 휴대폰 시장의 강자 노키아와 손잡고 스마트폰과 넷북을 능가하는 차세대 휴대기기를 공동 개발하기로 했다. 두 회사는 구체적으로 어떤 제품을 생산할지는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인텔이 노키아의 3세대 이동통신 모뎀 기술을 라이선싱한 뒤 양사가 스마트폰이나 넷북과는 다른 새로운 형태의 휴대용 컴퓨팅 기기(mobile computing product)를 공동 개발한다는 데 합의했다.

영국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FT)는 휴대폰 반도체 시장 진출을 갈망하던 인텔과 스마트폰 시장에서 애플 RIM 등의 경쟁 업체에 밀려 고전하고 있는 노키아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라고 설명했다. 인텔은 PC 시장에서는 80%를 차지하고 있지만 휴대폰 시장은 영국 반도체 설계업체 ARM과 생산업체 퀄컴 · 텍사스인스트루먼트에 완전히 빼앗긴 상태다. 노키아도 인텔과의 제휴로 스마트폰 시장에서 애플 RIM HTC 등 경쟁자의 거센 추격을 뿌리친다는 계산이다.

휴대기기 전문 조사업체 ABI의 제프 오르 선임 애널리스트는 "인텔과의 협력 작업으로 노키아는 인텔의 반도체 개발을 자사에 유리한 방향으로 끌고 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노키아는 인텔의 독보적인 컴퓨터 기술도 흡수해 스마트폰용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데 이점을 누릴 수 있다.

그렇다고 인텔과 노키아가 여기에만 매달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두 회사 모두 휴대용 디지털기기 시장에서 영역을 넓혀가기 위해 각각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노키아는 올 3분기 자사 브랜드를 단 넷북을 출시할 예정이다. 지난 25일 블룸버그통신은 노키아가 대만 노트북 조립업체 콴타에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인텔 아톰칩을 탑재한 넷북을 생산하도록 주문했다고 보도했다. 노키아는 퀄컴 스냅드래곤 칩을 탑재한 스마트북도 대만 컴팔을 통해 OEM 방식으로 생산한다는 계획이다. 노키아의 넷북 시장 진출은 휴대인터넷 기기에서 전통적인 휴대폰과 PC 의 경계가 사라지는 데 대한 대응으로 풀이되고 있다.

인텔은 자사 프로세서에 이동통신 모뎀을 결합한 플랫폼 '무어스타운'을 내년 초 선보이고 이를 기반으로 PC폰을 개발한다는 계획이다. 내년에 나올 PC폰을 개발할 회사는 지난 2월 초 인텔과 제휴한 LG전자다. 여기에 들어가는 플랫폼은 국내 벤처업체인 인프라웨어가 담당하고 각종 응용소프트웨어를 자유롭게 거래할 오픈마켓은 SK텔레콤이 맡는다.

무어스타운이 개발되면 PC업체들은 인텔의 칩을 가져다 PC나 노트북을 만드는 것처럼 무어스타운을 구매해 케이스나 액정표시장치 등을 조립하면 손쉽게 차세대폰을 개발할 수 있다. 인텔은 무어스타운을 탑재한 제품이 외부에서도 인터넷을 보다 쉽게 쓸 수 있는 기기라는 의미에서 '모바일 인터넷 디바이스'(MID)라고 부른다. 인텔은 빌 콜더 인텔 대변인이 최근 "무어스타운 등 마이크로프로세서는 인텔의 성장엔진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을 정도로 모바일 시장 진출에 관심을 쏟고 있다.

그래픽 칩셋의 명가 엔디비아도 지난달 초 '테그라' 칩셋을 내놓으면서 넷북 시장 진출을 선언했다. 엔디비아는 인텔의 아톰보다 저렴한 가격에 더 나은 시스템을 구성할 수 있게 하겠다며 무려 12종 이상의 테그라 관련 제품군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모바일 칩 설계시장을 독점하는 ARM과 멀티미디어에 강한 엔디비아가 손을 잡아 시너지 효과가 상당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전망하고 있다. 올 3분기 등장할 마이크로소프트의 휴대용 멀티미디어 플레이어 준(Zune)HD도 테그라를 사용할 계획이다.

조귀동 기자 claymor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