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신경제의 상징"으로 군림하던 인텔 선마이크로시스템즈 루슨트테크놀러지 등 세계적 IT(정보기술)기업들의 실적 악화는 세계 IT산업 전반에 치명타를 안겼다. 주가는 폭락했으며 경기도 고꾸라졌다. 주요 IT기업들의 실적은 한동안 호전되는듯 보였으나 최근 다시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판명나면서 상황이 크게 나아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런 쓰라린 경험이 IT산업의 존재가치를 무의미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역경은 지속되고 있지만 이들 업체는 재도약을 위한 날갯짓을 준비하고 있다. 세계 IT산업을 이끌고 있는 이들은 '무어의 법칙'이 적어도 향후 10년간은 이어질 것으로 자신한다. '컴퓨터 마이크로 프로세서의 성능은 18개월마다 두 배씩 향상된다'는 이 법칙이 지속되는 한 IT산업이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될 수밖에 없다는 믿음이다. 실리콘밸리의 터줏대감인 인텔 최고경영자(CEO) 크레이그 배럿 사장은 "조만간 사람들은 강력한 성능의 PC에 의존해 풍부하고 다양한 멀티미디어 인터넷과 엔터테인먼트를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휴대폰 가전제품 등 디지털기기들이 끊임없는 진화과정을 거치면서 PC의 기능을 이용하고 한편으로는 PC 환경 속에 융합되면서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차세대 PC시대를 열어갈 것"으로 전망했다. 말로만 명령하면 PC가 알아서 척척 반응하는 시대도 멀지 않았다. 인텔의 최고기술책임자(CTO)인 패트릭 겔싱어는 "현재 초당 1억7천만사이클인 PC의 연산속도가 10년 후엔 10배인 초당 10억사이클로 빨라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선 반도체 기술이나 트랜지스터 집적도의 향상에만 기댈 수 없다. 네트워크 기술 발전이 전제돼야 한다. 루슨트테크놀로지의 CEO 팻 루소는 "광통신 스위칭 데이터 네트워킹뿐만 아니라 3세대 무선통신 솔루션의 기술 발전으로 조만간 고용량 데이터 전송이 나노초 단위로 실현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2∼3시간 분량의 동화상도 눈깜짝할 사이에 전송받을 수 있는 시대가 멀지 않았다는 얘기다. 알카텔의 e비즈니스 네트워크사업본부 패트릭 리오 사장은 "본사와 지사,기업과 파트너 회사간 경계를 없앤 '국경없는 기업(Boardless Enterprise)'을 만들 수 있도록 다양한 솔루션을 하나의 플랫폼에서 구현하는 제품을 개발 중"이라고 말했다. 폭증하는 데이터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관리해야 할지를 놓고 골머리를 앓을 필요도 없게 된다. EMC 등 스토리지 업체들은 이(異)기종 서버나 스토리지에 저장된 데이터를 원활하게 공유하고 관리할 수 있는 기술 개발에 몰두하고 있다. EMC는 정보자산관리기술을 지원,통상 3년 걸리는 도요타자동차의 경주용 자동차 개발기간을 절반으로 단축시켰다. IBM은 올들어 'e소싱'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전기 전화 수도 가스같은 공공재처럼 IT서비스도 사용한 만큼 요금을 지불하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다. 표준화된 프로세서와 애플리케이션,잘 정비된 인프라 스트럭처가 이를 가능하게 한다. 집 안에 앉아 각종 IT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e소싱 시대의 개막'은 IT산업의 패러다임 전환을 웅변으로 보여주고 있다. 실리콘밸리=김남국 기자 n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