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서 소련과 두번 전쟁…우크라 침공에 되살아난 집단기억
"푸틴, 무슨 일 저지를 지 몰라" "나토 가입에 안심"
[핀란드르포] "소련의 침공을 잊을 수 없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보는 핀란드 사람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했을 거예요"
6일(현지시간) 헬싱키의 핀란드 의회 앞에서 만난 한 50대 핀란드 시민 A씨는 핀란드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에 관해 묻자 자신들의 역사를 먼저 언급했다.

핀란드는 살기 좋은 나라 순위에서 항상 최상위권으로 꼽히는 북유럽의 선진국이지만 근현대사는 매우 고단했다.

수백 년간 스웨덴에 속했다가 1809년 스웨덴과 러시아 전쟁 뒤 100여 년간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자치권이 있는 대공국의 지위를 부여받은 핀란드는 1917년 독립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초반인 1939년 소련의 공격을 받아 영토의 10%가량을 넘겨줬고, 1941∼1944년 또 한 번 소련과 전쟁을 치렀다.

특히 1939년 11월부터 1940년 3월까지 105일간 이어진 러시아와의 '겨울 전쟁'을 치르면서 핀란드에선 2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핀란드 수도 헬싱키엔 이런 비극적 역사를 증명하는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와 치른 전쟁은 핀란드 국민의 기억 속에 여전한 듯했다.

"러시아는 과거에 이미 우리를 공격한 적이 있어요.

핀란드 사람들은 그때 목숨을 잃은 조부모나 증조부모, 친척들이 있고요.

자신이 직접 겪은 일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때를 아직 기억합니다"
A씨는 그러면서 "우크라이나를 보고 우리는 과거 일을 다시 떠올렸다"며 "러시아의 공격이 시작됐을 때 사람들은 아마 우리가 이미 겪은 일이라고 느꼈을 테고 다시는 이런 일을 겪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라고 말했다.

핀란드의 나토 가입 결정에 "안심이 된다"고 했다.

그는 "2년 전에 내게 나토 가입에 관해 물었다면 아마 무관심했었을 것"이라며 "러시아가 다른 자주 국가를 침공한 것은 엄청나게 충격적이고 끔찍한 악몽과도 같은 일"이라고 말했다.

[핀란드르포] "소련의 침공을 잊을 수 없다"
핀란드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70여 년간 고수한 군사적 비동맹주의 정책을 버리고 5월 나토 가입을 선택했다.

핀란드 국민의 나토 가입 지지 여론은 유례없이 높아져 5월 여론조사에서는 거의 80% 가까이 치솟았다.

나토 30개 회원국은 이미 핀란드의 가입의정서에 서명했고 최종 가입까지 회원국 의회 비준 절차만 남겨뒀다.

이웃 스웨덴도 핀란드와 같은 길을 선택했다.

헬싱키 선착장에서 페리를 타고 15분 정도 거리의 군도에 있는 수오멘린나(Suomenlinna)는 지금은 유명 관광지가 됐지만 이곳 역시 핀란드와 러시아가 얽힌 '적대적 역사'의 현장이다.

[핀란드르포] "소련의 침공을 잊을 수 없다"
핀란드가 스웨덴의 일부였던 1700년대 중반 스웨덴이 러시아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808년 전쟁에서 러시아에 넘어가게 되고 이후 100여 년간 러시아의 해군 기지로 사용됐다.

핀란드는 독립 이듬해 이곳을 되찾아 '핀란드의 요새'라는 뜻을 지닌 현재의 이름을 새로 붙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핀란드 병력이 주둔하고 잠수함 기지로 사용되기도 했다.

[핀란드르포] "소련의 침공을 잊을 수 없다"
이곳에 사는 주민 이라말리(75)씨는 "우리 옆에는 러시아가 있다"며 "우리는 이미 러시아의 공격을 받은 적이 있고 푸틴이 무슨 일을 할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이라말리 씨 역시 정부의 나토 가입 결정을 크게 환영했다.

수오멘린나에서 헬싱키로 돌아가는 페리에서 만난 마리아 테르툴레톨라(62)씨는 아버지가 2차 세계대전 때 어린 나이에 러시아군과 싸운 참전군인이라고 했다.

"같은 나이의 어린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는 현실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버지에게 들어 잘 알고 있어요.

죽임을 당하고 싶지 않으면 죽여야 하는 게 전쟁이에요"
테르툴레톨라 씨는 그래서 러시아의 침공 소식을 듣고 매우 놀라고 슬펐다고 한다.

[핀란드르포] "소련의 침공을 잊을 수 없다"
그는 "핀란드는 침공 이전에는 매우 안정적이고 조용한 곳이었는데 요새는 좀 걱정이 돼 나토 가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헬싱키 시내에서 만난 실쿠크(58)씨는 "핀란드의 나토 가입과 관련해서는 오랫동안 생각을 정하지 못했는데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결국 좋은 결정이라고 본다"며 "우리를 더 잘 보호할 수 있고 평화에 더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현재 러시아 지도부가 어떤 결정을 할지 예측하기 어렵고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을 것 같다"며 불안을 감추지 못했다.

외침의 상처가 있는 핀란드는 자력으로 영토를 방어하기 위해 징병제를 채택하고 있다.

모든 핀란드 성인 남성은 군 복무의 의무를 진다.

일반 사병은 의무 복무 후에도 50세가 될 때까지 일정 기간 내에서 예비역으로 재교육 훈련을 받는다.

실쿠크 씨는 "핀란드가 나토의 일원으로 병력을 세계 다른 나라에 보내게 될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걱정되는 것은 사실"이라며 "아들이 나토군에 소속돼 세계 어디에서든 전쟁에 관여되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핀란드르포] "소련의 침공을 잊을 수 없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