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위기 속 생필품 부족으로 슈퍼마켓마다 몇 시간 대기는 기본
미국의 제재·코로나19·이중통화 폐지 등 맞물려 상황 악화
[르포] 진열대엔 생수와 칫솔뿐…최고난도 서바이벌 미션 쿠바 장보기
어둠이 걷히지 않은 오전 6시께 도착한 쿠바 수도 아바나의 한 대형 슈퍼마켓 정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길게 늘어서 있을 것으로 예상했던 쇼핑객의 줄도 보이지 않았다.

정문 앞에 서 있던 경비에게 물으니 한 블록 아래를 손짓했다.

한 블록을 걸어 내려가 오른쪽으로 꺾자 장바구니를 든 사람들 20∼30명이 삼삼오오 서 있었다.

슈퍼마켓 개장 시간까진 3시간이 남은 시점이었다.

심각한 물품 부족이 계속되는 카리브해 쿠바에서 '장보기'는 상당한 시간과 돈, 노력이 필요한 고난도 업무다.

기자는 지난 10일 아바나에서의 '장보기 (시도)' 난도가 어느 정도인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삼삼오오 서 있는 사람 중에서 어디가 줄의 처음이고 어디가 끝인지 두리번거리자 한 여성이 자신이 '울티마'(ultima·마지막)라고 알려줬다.

곧이어 한 남성이 다가와 '울티마'를 찾았고, 기자가 손을 들자 내 얼굴과 그 앞사람 얼굴까지 확인한 후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르포] 진열대엔 생수와 칫솔뿐…최고난도 서바이벌 미션 쿠바 장보기
일렬로 서지 않아도 앞사람들 얼굴을 외워 자기 차례를 기억하는 쿠바인들의 노련한 줄 서기 방식이었다.

후스나라는 여성은 새벽 4시에 일어나 45분 차를 타고 이곳에 왔다고 했다.

이 슈퍼마켓은 유로 등 외화를 입금해서 쓰는 MLC(자유전환통화) 카드로 결제하는 가게다.

쿠바에선 지난해부터 이러한 국영 외화상점들이 생겨났는데 일반 상점보다 물건이 많은 편이라 사람이 몰렸다.

후스나는 "스페인에서 일하는 딸이 돈을 보내올 때마다 장을 보러 온다"며 "가능한 한 많은 물건을 사갈 것"이라고 했다.

먼저 온 사람들은 이날은 줄이 거의 없는 편이라면서 7시면 슈퍼 직원이 번호표를 나눠줄 것이라고 했지만 웬일인지 개장 시간인 9시를 넘겨도 감감무소식이었다.

늦어도 10시 30분이면 아바나를 떠나야 하는 기자는 사정이 좀 나을 것 같은 근처의 작은 슈퍼마켓으로 이동했는데 거기에도 이미 10명쯤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이번엔 새치기 방지를 위해 직원이 나와서 신분증을 걷어가는 단계까진 진입했으나 출발해야 하는 시간까지 끝내 차례가 오지 않아 신분증을 돌려받고 떠나야 했다.

[르포] 진열대엔 생수와 칫솔뿐…최고난도 서바이벌 미션 쿠바 장보기
아쉬운 마음에 유리 너머로 본 상점 안엔 생수와 음료수 등 생필품 몇 가지만 진열돼 있었다.

전날 지방의 한 상점에서 본 풍경도 비슷했다.

크기가 다른 생수들과 칫솔, 칠레 와인 1종이 전부였다.

그래도 소용량 생수는 아바나에선 구하기 쉽지 않다며 택시 기사 호르헤는 한 묶음을 차에 실었다.

쿠바의 물품 부족은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1960년대부터 유지된 미국의 금수조치로 쿠바에선 물자가 늘 귀했다.

도널드 트럼프 정권에서 다시 확대된 미국의 제재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등으로 쿠바 경제위기가 깊어지며 최근 그 정도가 더 심해졌다.

화장지, 세제 등 공산품은 물론 70%를 수입에 의존하는 식품도 크게 부족해졌다.

올해 초 이중통화 폐지도 혼란을 키웠다.

쿠바는 1994년부터 일반 쿠바 페소(CUP)와 '1달러 = 1페소'로 고정돼 외국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태환 페소(CUC)가 공존해왔다.

일반적으로 '1 CUC = 24∼25 CUP'의 비율로 교환되는데, 국영 수입업체 등에는 정부가 '1 CUC = 1 CUP'의 환율을 적용해줬다.

[르포] 진열대엔 생수와 칫솔뿐…최고난도 서바이벌 미션 쿠바 장보기
쿠바 당국이 경제개혁의 일환으로 1월부터 CUC을 없애면서 수입업체들은 환율 우대를 받지 못하게 됐고 구매력이 줄어드니 수입 물량도 급감했다.

페소 약세와 함께 물가도 가파르게 올라 올해 물가상승률은 500%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고 로이터통신은 보도했다.

일반 국민은 돈도 궁해졌지만, 돈이 있어도 물건이 없어 사기 힘들다.

한 번 장을 보려면 새벽같이 집을 나서 몇 시간이고 기다려야 한다.

줄 서서 물건을 산 후 더 비싸게 되파는 이들도 생겼고, 코로나19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엔 통금 종료 시각인 새벽 5시가 되자마자 줄을 서기 위해 나무 위 등에서 밤새 숨어있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장보기에 성공하려면 정보력과 운도 필요하다.

가게마다 모든 물건이 있는 건 아니기 때문에 시민들은 왓츠앱 메신저 등을 통해 어느 가게에 어느 물건이 들어왔다는 정보를 공유한다.

생필품 정보를 공유하는 한 왓츠앱 그룹에선 어느 슈퍼에 닭고기와 다진고기, 소시지, 치약, 비누가 있다는 글이 올라왔다.

[르포] 진열대엔 생수와 칫솔뿐…최고난도 서바이벌 미션 쿠바 장보기
기자가 이날 갔던 슈퍼마켓엔 기다리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은 편이었는데 "사람이 적다는 건 안에 살 것이 별로 없다는 뜻"이라고 현지 주민이 귀띔했다.

몇 시간을 기다려도 내 앞에서 원하는 물건이 떨어지면 살 수가 없고, 잦은 정전으로 자신의 차례에 카드단말기가 먹통이 되기라도 하면 역시 빈손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아바나 시민 마누엘은 얼마나 자주 장을 보냐고 묻자 "할 수 있을 때마다"라고 답하며 "요즘엔 가게마다 있는 물건들이 비슷하다"고 했다.

식재료 구하기 어렵다 보니 즐겨 먹는 음식도 '그때 그때 구해지는 음식'이라고 지방도시 카르데나스의 한 주민은 말했다.

쌀과 파스타, 설탕 등 필수 식재료는 정부가 배급해줘서 굶는 이들은 없지만, 배급품 중에서도 달걀, 닭고기 등은 귀하다.

극심한 생필품난은 지난 7월 11일 쿠바에서 벌어진 이례적인 반(反)정부 시위의 원인 중 하나였다.

쿠바 당국은 이러한 위기가 미국 제재 탓이라고 비판하면서도 입국자의 음식·의료품 반입 한도를 없애는 등의 자구책을 내놨다.

지난 8월 민간 중소기업의 설립도 허용됐고 지난달부터는 오랜 봉쇄도 해제돼 외국인 관광객들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다.

그러나 생필품난이 언제쯤 해소될지는 누구도 예측하기 힘들다.

전날 기자가 슈퍼마켓에 가겠다는 계획을 전하자 "들어가지도 못할 것"이라고 예언했던 현지 주민은 실제로 4시간여의 기다림에도 장보기에 실패했다는 소식에 "쿠바 슈퍼가 아무나 가는 데가 아니다"라며 자조 섞인 웃음을 보였다.

[르포] 진열대엔 생수와 칫솔뿐…최고난도 서바이벌 미션 쿠바 장보기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