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당 대회 앞두고 1인체제 공고화…문화대혁명 '재난' 규정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초장기 집권의 길을 여는 의미로 평가된 중국 공산당 제3차 역사결의(당의 100년 분투의 중대 성취와 역사 경험에 관한 중공 중앙의 결의) 전문이 16일 공개됐다. 관영 신화 통신에 따르면 중국 공산당은 지난 11일 19기 중앙위원회 6차 전체회의(19기 6중 전회)에서 채택된 3만6천여자 분량의 역대 세 번째 역사결의 전문을 공개했다. 중국 공산당은 역사결의 채택 당일 역사결의 요지를 담은 '공보'를 공개했다. 이번 결의는 1945년 1차와 1981년 2차에 이어 중국 공산당 100년 역사상 3번째 채택된 역사결의다. 1, 2차 역사결의가 각각 2만7천여자, 3만4천여자인 것과 비교하면 3차 역사결의가 분량이 가장 분량 많다. 3차 역사결의는 서문, 신민주주의혁명의 위대한 승리, 사회주의 혁명의 완성과 사회주의 건설 추진, 개혁·개방 진행과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 중국 특색 사회주의 신시대 창립, 중국공산당 100년 분투의 역사결의, 중국공산당 100년 분투의 역사경험, 신시대 중국공산당 등 총 8개 주제로 구성됐다. 특히 시 주석의 집권 1기부터 현재까지 통치 여정을 담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신시대 창립' 부분은 전체 분량의 절반이 넘는 1만9천200여자를 차지하고 있다. 이번 역사결의 채택이 내년 가을 제20차 당 대회에서 3연임할(재임기간 총 15년으로 연장) 예정인 시 주석의 초장기집권의 길을 열기 위한 절차임을 반영한다. 마오쩌둥(毛澤東)이 이끈 '신민주주의혁명기'와 '사회주의 혁명 건설기'는 합쳐서 5천500여자, 덩샤오핑(鄧小平)이 시작해 장쩌민(江澤民)·후진타오(胡錦濤)가 이어간 것으로 규정한 '개혁개방과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의 새 시기'는 4천100여 자에 그쳤다. 서문에는 중국 공산당 100년사를 총괄하고 그간의 성과, 시 주석을 핵심으로 한 당 중앙 수호 등 역사결의 작성의 취지를 설명해놨다. 시 주석의 집권기 이전의 역사 여정을 설명한 1∼3 챕터는 신중국 건국 과정과 앞선 당 지도자들의 성과를 기술해놨다. 이 부분에서 한국 전쟁을 '항미원조'(抗美援朝·미국에 맞서 북한을 도움) 전쟁으로 기술하고, 위대한 승리를 거뒀다고 평가했다. 또 문화대혁명(1966∼1976)과 대약진 운동에 대해서도 2차 역사결의와 마찬가지로 '재난'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마오쩌둥 전 국가 주석의 과오로 평가했다. 앞서 6중전회 공보에서는 문화대혁명에 대한 직접적 언급이 없어 이번 역사결의에서 다뤄지지 않은 것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됐으나 결국 이전 역사결의의 기술을 대체로 계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마오쩌둥 전 주석의 시기를 한 챕터로 따로 분류한 것과 달리 덩샤오핑(鄧小平·1904∼1997), 장쩌민(江澤民), 후진타오(胡錦濤) 집권기는 세 시기를 하나로 묶어 한 챕터에 담았다. 역사결의는 이 시기를 개혁·개방 진행과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기로 규정했으며, 특별한 과오를 적시하지 않았다. 이번 역사결의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시진핑 집권기는 집권 1기인 18기부터 성과를 나열하며 시진핑 신(新)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의 중요성을 부각했다. 또 당 지도, 반부패, 경제 발전, 개혁 개방 심화, 의법치국, 문화 발전, 사회 건설, 생태 문명 건설, 국방, 안보, 일국양제 및 조국 통일, 외교 등 13개 소주제로 나눠 분야별 성과를 자세히 기록했다. 이번 역사결의의 요지는 6중 전회 공보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시 주석의 '당 핵심' 지위를 강조하는 데 있다. 아울러 역사결의는 당의 주된 임무가 시 주석을 중심으로 두 번째 100주년(중화인민공화국 성립 100년이 되는 2049년)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며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달성하는 웅대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은 마오쩌둥 집권기인 1945년 4월 20일 1차 역사결의(약간의 역사 문제에 관한 결의)를 채택했으며, 덩샤오핑 집권기인 1981년 6월 27일 2차 역사결의(건국 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 문제에 관한 결의)를 채택한 바 있다. 한편 이번 결의 전문이 시 주석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간의 영상 정상회담이 열린 당일 공개된 점도 눈길을 끈다. 최강대국인 미국의 정상에 당당히 맞서 주장할 바를 주장하는 지도자의 이미지가 부각되는 날에 맞춰 시 주석의 치적과 역사적 지위를 강조한 역사결의의 전문을 공개함으로써 정치적 효과의 극대화를 노렸다는 관측도 나온다. 즉, 시 주석의 3연임이 결정될 내년 하반기 제20차 당 대회를 앞두고 '미중 정상회담'과 '역사 결의'가 시너지 작용을 일으키며 시 주석의 권위를 세우도록 일정을 배치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는 것이다. /연합뉴스
채택 5일만에 전문 …문혁 비판 계승하고 코로나 대응 자찬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 초장기 집권의 길을 여는 의미로 평가된 중국 공산당 제3차 역사결의(당의 100년 분투의 중대 성취와 역사 경험에 관한 결의)는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를 "정치풍파", "동란" 등 표현으로 묘사한 것으로 파악됐다. 중국 공산당은 지난 11일 19기 중앙위원회 6차 전체회의(19기 6중 전회)에서 채택된 3만6천여자 분량의 역대 세 번째 역사결의(이하 결의) 전문을 공개했다. 역사결의 채택 당일 결의 요지를 담은 '공보'를 발표한지 5일 만에 전문을 공개한 것이다. 결의 내용 중 시 주석을 마오쩌둥(毛澤東·1893∼1976), 덩샤오핑(鄧小平·1904∼1997)을 잇는 중국 공산당 100년사의 3대(大) 지도자 반열에 올리는 동시에 '새 시대'의 첫 지도자로 규정하는 내용은 공보에 소개된 바와 같았지만 공보에 거론되지 않았던 논쟁적 사건에 대한 언급도 담고 있었다. ◇ 6·4 사태 "정치풍파"·"동란" 묘사 결의는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 소련이 해체되고 동유럽이 격변했다"며 "국제사회 반(反) 공산주의·반 사회주의 적대 세력의 지지와 선동으로 인해 국제적인 큰 기류와 국내의 작은 기류는 1989년 봄에서 여름으로 가는 시기에 우리나라에 엄중한 정치 풍파를 초래했다"고 기술했다. 그러면서 "당과 정부는 인민을 의지해 동란(動亂)에 선명하게 반대하는 것을 기치로 해서 사회주의 국가 정권과 인민의 근본 이익을 수호했다"고 부연했다. 반 부패와 개혁 등을 요구한 대학생 중심의 시민 시위대가 인민해방군에 의해 유혈 진압되면서 많은 사상자를 낳은 톈안먼 사태를 '엄중한 정치 풍파'이자 '동란'으로 규정한 것이다. 2차 역사결의가 개혁개방 초기인 1981년에 나왔기에 1989년 톈안먼 사태에 대한 역사결의상 기술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 문화대혁명 '10년 내란' 규정…마오 책임 인정하되, '이용당했다' 평가 결의는 수많은 인명과 재산 및 정서적 피해를 초래한 '극좌 사회주의 정풍 운동'인 문화대혁명(문혁·1966∼1976)과 대약진운동 등 마오쩌둥 시기의 과오에 대해 직전 역사결의가 지적한 비판적 기조를 유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 결의는 "유감스럽게도 제8차 당 대회(1956년)에서 형성된 바른 노선이 완전하게 견지되지 못해 '대약진운동', '인민공사화 운동' 등의 착오가 잇달아 발생하고 반우파투쟁도 심각하게 확대됐다"고 기술했다. 대약진운동은 마오 주도 하에 1958년부터 1960년 초 사이에 일어난 경제도약 운동으로, 철강 등 공업 생산력의 비약을 목표로 했지만 농업경제 파탄으로 인해 수많은 아사자를 낳았다. 또 인민공사는 역시 마오 주도로 1958년 농업 집단화를 위해 만든 대규모 집단농장을 말한다. 생산수단의 집단소유와 공유제를 급속히 추진하는 과정에서 많은 혼란을 불렀다. 결의는 또 문화대혁명에 대해 "사회주의 사회 계급 투쟁의 이론과 실천에 관한 마오쩌둥 동지의 착오는 갈수록 심각해졌고, 당 중앙은 적시에 이런 착오를 수정하지 못했다"며 "마오쩌둥 동지는 당시 우리나라 계급 형세와 당 및 국가 정치 상황에 대해 완전히 잘못 평가해서 문화대혁명을 발동하고 영도했다"고 지적했다. 다만 "린뱌오(林彪·1907∼1971), 장칭(江靑·1914∼1991) 두 반혁명 집단이 마오쩌둥 동지의 착오를 이용해 국가와 백성에게 재앙을 가져오는 죄악된 활동을 해 10년 내란을 빚어내고, 당과 국가, 인민이 신 중국 성립 이래 가장 심각한 좌절과 손실을 겪게 했다. 교훈은 극도로 비통했다"고 적어 마오가 이용당했다는 시각을 담았다. ◇코로나 대응 "중대한 전략적 성과" 자평 중국이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응 과정에서 고강도 봉쇄 및 격리, 신속한 백신 보급 등으로 국내 피해 최소화에 성공한 반면 작년 초 우한(武漢)에서의초기 확산을 제대로 막지 못해 국제적 피해를 키웠다는 지적이 많지만 이번 결의는 "전염병에 맞선 투쟁은 중대한 전략적 성과를 거뒀고 위대한 항역(전염병과의 싸움) 정신을 만들어 냈다"며 자찬했다. 결의는 "2020년 갑작스러운 코로나19에 직면하여 당 중앙위원회는 단호한 결정을 내리고 침착하게 대응했으며 '인민 지상(至上)', '생명 지상'을 견지했다"고 평가했다. /연합뉴스
아르메니아 국방부 "군사 진지 2곳 상실…사상자 숫자 확인 중" 지난해 전쟁을 치른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국경에서 무력 충돌이 발생해 아르메니아 측에서 사상자가 발생했다. AFP통신에 따르면 아르메니아 국방부는 16일(현지시간) "아제르바이잔군의 공격에 따른 교전으로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밝혔다. 이어 "오후 4시 현재 사상자 숫자를 확인하고 있으며 군사 진지 2곳의 통제를 상실했다"고 덧붙였다. 구소련 구성국인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는 지난해 9월 양측의 분쟁 지역인 '나고르노-카라바흐'를 놓고 전쟁을 벌였다. 양측은 지난해 11월 10일 러시아의 중재로 평화협정에 합의했으나 실상은 아제르바이잔의 완승으로 전쟁은 마무리됐다. 아제르바이잔은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주요 지역 대부분을 수복했으며, 러시아는 양측의 충돌 방지를 위해 나고르노-카라바흐에 평화유지군을 배치했다. 양측은 그러나 평화협정 체결 이후에도 산발적인 교전을 이어왔다.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은 옛 소련 시절 아르메니아계 주민이 다수인 아제르바이잔 영토였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하자 나고르노-카라바흐는 독립공화국을 세운 뒤 아르메니아와 통합하겠다고 선포했으나, 아제르바이잔이 이를 거부하면서 양측이 1992∼1994년 치열한 전쟁을 치렀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