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리 람 행정장관 베이징에 '지침' 요청
비상 명분 삼아 친중파 의회 '접수' 가능성
야권 '입법 블랙홀' 우려…"가혹한 법안 양산될 것"
홍콩 정국 총선 연기로 '시계제로'…초유의 의회 공백 1년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을 이유로 내달 치러질 홍콩 입법회(의회) 선거를 1년 뒤로 미루겠다고 전격 발표하면서 홍콩 정국이 시계 제로 상황에 빠져드는 양상이다.

홍콩의 민주 진영은 야권의 정치적 활동 공간을 극도로 제약하는 홍콩 국가보안법 발효에 이어 친중파 세력이 향후 1년간 '비상시기' 입법권까지 장악한 채 그간 야권의 저지로 통과시키지 못한 각종 법률을 무더기로 양산해낼 수도 있다고 우려한다.

2일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등에 따르면 입법회 선거가 1년 연기됨에 따라 홍콩에서는 현 입법회 의원들의 임기 문제를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를 놓고 여러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홍콩의 헌법 격인 홍콩기본법은 입법회 의원의 임기를 명확하게 4년으로 규정한다.

따라서 오는 9월 현 의원들의 임기가 끝나면 홍콩 주권이 중국으로 반환되고 나서 의회가 존재하지 않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 수 있게 된다.

영국 식민 통치 시절의 유산인 '긴급정황규례조례'(긴급법)를 근거로 입법회 선거를 연기한 람 행정장관은 중국 중앙정부에 공식 서한을 보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유권 해석'을 요청한 상태다.

홍콩에서는 크게 중국 의회인 전국인민대표대회가 홍콩의 '임시 의원'을 임명하는 방안과 현 의원들의 임기를 연장하는 방안 두 가지가 거론되고 있다.

홍콩 내각인 행정회의 구성원인 입궉힘(葉國謙)은 전인대 상무위원회가 1년간 입법을 맡을 '임시 의원'을 지정하면 된다고 제안했다.

전인대 대표이기도 한 입궉힘은 중국이 임명하는 '임시 의원'을 주로 홍콩 입법회의 현역 의원들로 구성할 수 있지만 일부 외부 인사를 임명하거나 선거 후보 자격이 제한된 '부격적자'는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사실상 홍콩 임시 내각에서 현재의 야당 의원들 상당수를 축출하고 그 자리에 친중파 인사를 채워 넣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홍콩 선거관리위원회는 최근 현역 입법회 의원 4명을 포함한 12명의 입법회 선거 출마 자격을 제한하는 결정을 내린 바 있다.

홍콩 정국 총선 연기로 '시계제로'…초유의 의회 공백 1년
그러나 이런 방안은 가뜩이나 홍콩보안법 제정으로 유명무실해졌다는 평가를 받은 홍콩의 자율성에 관한 우려를 키울 수 있다는 점에서 친중파 진영 안에서도 반대 목소리가 나온다.

같은 행정회 구성원인 로니 퉁은 중국 본토의 개입은 최소한도로 이뤄져야 한다는 원칙을 강조하면서 중국 전인대가 임시 위원을 임명하는 방식이 아니라 홍콩 스스로 임시 의회를 소집해야 한다는 취지의 주장을 폈다.

그러나 어느 방식이든 '비상시기'라는 이유로 현재의 야당 의원들이 향후 1년간 입법 과정에서 배제될 가능성이 상당하다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람 행정장관은 차기 입법회 선거 출마 자격을 제한당한 현역 4명이 향후 의원직을 계속 수행할 수 있는지와 관련해 모호한 태도를 유지 중이다.

그는 1일 '개인 의견'임을 전제로 "모든 현역 의원들이 행정부와 협력을 하면서 자리를 지키기를 원한다"면서도 출마 자격을 제한당한 4명의 야당 의원들의 '임기 연장' 문제는 전인대 상무위원회가 결정할 문제라고 말했다.

22명의 야권 의원들은 1일 공동 성명을 내고 람 행정장관의 총선 연기 결정이 헌법적 위기를 초래하고 홍콩의 자율성을 더욱 저해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야당 의원들은 "긴급법 발동으로 의회가 블랙홀에 빠져들었다"며 "(정부가) 이를 기회로 삼아 가혹한 법과 정책을 통과시킬 것"이라고 우려했다.

홍콩대 법대 에릭 청 교수는 SCMP에 중국 본토의 홍콩 입법회 임시 의원 임명은 반대 세력 없는 의회를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홍콩 입법회는 지역구 35석과 직능대표 35석 등 총 70석으로 구성된다.

직능대표석은 친중파가 대부분 장악해 지역구 선거에서 범민주파가 선전해도 의회 주도권을 확보하기가 극히 불리한 구조다.

이런 가운데 홍콩 민주 진영은 작년 11월 구의원 선거 압승의 여세를 몰아 이번 9월 입법회 선거에서 과반 의석 차지를 목표로 삼고 있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