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초 중국어 수업 붐벼 학생 없던 한국어 우연히 수강한 게 첫 인연
한국학, 폐과 위기 여러차례 극복하며 성장…파리 7대 한국학 전공생 100배 늘어
한국이 좋아 70년대에 딸도 입양…"한국 너무 빠른 속도로 변해 아쉬워"
[인터뷰] 60년 한국 사랑 외길, 프랑스 원로 한국학자 마크 오랑주
"케이팝과 한류는 취미의 영역이죠. 한국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한국어는 물론 법과 경제 등도 제대로 열심히 공부해야 해요.

"
마크 오랑주(83) 교수는 프랑스인들이 '한국'이라고 하면 한국전쟁이나 군사독재 외에는 떠올리는 다른 것이 거의 없던 시절, 프랑스에서 고군분투하며 한국학을 일군 1세대 한국학자로 꼽힌다.

프랑스 한국학의 '메카'인 파리 7대(디드로대)의 한국학 교수와 연구부총장을 거쳐 프랑스의 권위 있는 고등학술기관 '콜레주 드 프랑스'의 한국학연구소장을 역임한 오랑주 교수와 그 제자들의 노력으로 프랑스의 한국학은 이제 규모나 질적 측면에서 중국학이나 일본학에 크게 뒤지지 않는 대표적인 동아시아학으로 성장했다.

넉넉한 인품과 한국학에 대한 열정으로 프랑스의 한국학계의 '대부'로 통하는 그 제자인 파리 7대 한국학과 마리오랑주 리베라산 교수(한국현대사)와 함께 지난 18일 저녁 파리 근교 샤티옹의 자택에서 만나 60여년 간의 한국학자로서의 여정과 소회를 들어봤다.

한국에서 수집한 고서를 들춰보거나 후학들의 연구를 격려하며 노후를 보내는 그는 기자가 요즘 한류 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자 대뜸 "한류는 보고 즐기는 것이고, 한국학은 진지하게 공부해야 한다"면서 "한국어를 알려면 한자도 공부해야 하고 다른 학문 분야도 함께 열심히 익혀야 한다"는 학자다운 답변이 돌아왔다.

그가 몸담았던 파리 7대 한국학과는 초반에 학부생이 전체에 달랑 세 명밖에 없었을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350명으로 100배 이상 늘었다.

오랑주 교수는 학생 부족 등으로 한국학과가 폐지될 뻔한 여러 위기에서도 프랑스의 한국학이 유지·발전하는데 여러 국면에서 기여한 프랑스 한국학 발전의 숨은 공로자이자 산 증인으로 꼽힌다.

처음에 어떻게 한국학을 접하게 됐느냐는 물음에는 "대학 때 택했던 중국어 수업이 너무 붐벼 사람이 없는 한국어 수업에 얼떨결에 들어갔다"면서도 그는 "한국에 갈 때마다 그렇게 마음이 편하고 좋을 수 없었다"며 천진하게 웃었다.

오랑주 교수의 자택에는 수십년간 한국을 왕래하며 사들인 엿장수 가위, 옛 호텔 상호가 적힌 오래된 성냥갑, 밀짚모자, 대나무 비닐우산 등 한국의 생활사가 고스란히 담긴 오래된 물건들이 즐비했다.

이런 것들을 인터뷰 도중에 계속 꺼내 보여주면서 "정말 멋지지 않냐"는 말을 연발하는 이 노학자의 한국에 대한 사랑은 끝이 없어 보였다.

당초 두 시간가량 예정했던 인터뷰는 다섯 시간이 훨씬 넘게 이어졌다.

다음은 오랑주 교수, 리베라산 교수와 기자의 대화 내용이다.

-- 한국학을 처음에 어떻게 공부하게 됐나.

▲ 고등학교 때는 외과 의사가 되고 싶었다.

부친이 2차대전 당시 레지스탕스(프랑스의 비밀항전조직)로 활동하다가 비밀경찰에 끌려가 부헨발트 수용소에 다녀오신 뒤 쇠약해져 돌아가신 뒤로 집안이 기울었다.

공부에 돈과 시간이 많이 드는 의학은 내 처지에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쩌다 보니 소르본에서 법학을 택해 공부하게 됐다.

법학을 하면서도 60년대 초반 외국어에 대한 관심으로 동양어대학(현 프랑스 국립동양어문대학)에서 외국어를 함께 배우려고 마음먹고 중국어를 택했지만, 첫해에 낙제해 재수강했다.

당시 중국과 프랑스가 정식 수교(1964년)하기 직전이었는데 이미 프랑스에서 중국에 대한 관심이 커져 수강 첫해에 28명이던 중국어 수강생이 이듬해 가보니 120명으로 늘었더라. 학생이 너무 많아 발 디딜 틈이 없었는데 한 친구가 옆에 한국어 수업에 사람이 없으니 가보라고 했다.

그때 이옥(재불 한국학자·1928~2001) 교수님을 처음 만나 한글을 접한 것이 내가 한국학과 인연을 맺게 된 순간이다.

카페에서 학생들과 커피를 마시며 한국의 사회, 문화, 역사 등을 주제로 자유롭게 토론하며 한국어를 배웠다.

이후 소르본대의 일본학·한국학자 샤를 아그노엘 교수(1896~1976)로부터도 한국 언어학과 고문헌을 배웠는데 한 문장을 가르치는 데 1시간이 걸릴 만큼 꼼꼼하게 가르치는 분이었다.

그러다 프랑스에 68혁명이 일어났고 대학 교육이 완전히 바뀌어 지금과 같은 대학 시스템이 생겼다.

68혁명 이후 파리 7대에는 중국, 일본, 한국학이 모였는데, 좌파적이고 젊은 분위기 속에 자유롭고 학제적인 연구가 꽃을 피웠다.

-- 파리 7대의 한국학과가 없어질 위기가 많지 않았나.

▲ 많았다.

학부 3년 과정 전체에 학생이 단 세 명일 때도 있었다.

지금 7대 한국학과 전체 학생이 350명이 넘으니 100배 넘게 성장했다.

은사였던 이옥 선생님의 한국 내 인맥을 통해 한국 관련 자료를 많이 모았다.

대학 측에 한국인들이 프랑스의 한국학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인상을 줘서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한번은 대학 측이 한국학 교수와 강사들의 임금을 절반으로 깎으려고 해 싸워서 막아내기도 했다.

막강한 중국학 전공 교수들과 예산 배분을 놓고 싸운 기억도 많다.

70년대에는 파리 7대 연구부총장으로 재임하면서 한국학의 유지 발전을 위해 힘을 더할 수 있었다.

▲ (리베라산 교수) 나 역시 한정된 예산의 배분 문제로 중국학·일본학 교수들과 경쟁해야 할 때가 많다.

그래도 내가 7대에 부임한 2013년 한국학 교수가 3명뿐이었는데 지금은 9명으로 늘었다.

중국학과 일본학 교수가 각각 14명인 것을 고려하면 많이 좋아졌다.

[인터뷰] 60년 한국 사랑 외길, 프랑스 원로 한국학자 마크 오랑주
-- 케이팝이 프랑스의 젊은이들에게도 인기가 많다.

그래서 한국학에도 관심이 커진 것 같은데.
▲ 케이팝이나 대중문화는 즐기는 것이고 한국학은 학문이다.

한국어만 공부해서도 안 된다.

법, 경제, 역사 등 다른 분야도 폭넓게 공부해야 한다.

한국어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한자도 많이 알아야 한다.

한국도 요즘 학생들은 한자를 많이 모르지 않나.

▲ (리베라산 교수) 한류가 좋아서 한국학과에 왔다가 한국학이 매우 진지한 인문학이라는 깨닫고 떠나는 학생도 일부 있다.

하지만 많은 학생이 졸업할 때쯤이면 한국어와 한국의 역사, 사회를 이해하는 진지한 한국학도가 된다.

오래전 오랑주 교수님의 기초 한국어 수업을 들었는데 아침 8시 수업이라 너무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웃음). 사전을 찾고 필요한 주제에 따라 한국어 문헌을 찾아 해독하는 방법을 가르친 수업이었는데 지금도 그때 배운 것이 많은 도움이 된다.

원래 나는 중국학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천안문 사태로 중국에 공부하러 가려던 계획을 접고 한국학으로 진로를 틀었다.

민주화 과정에 관심이 많았는데, 한국은 민주화의 생생한 현장이었다.

진로를 정하는 데에는 마크 오랑주 교수님의 역할이 컸다.

-- 주된 연구 분야가 한국학 중에서도 문학(조선시대 문학)인데, 특별히 좋아하는 한국 작품이 있나.

▲ 황석영을 좋아했다.

그의 단편들을 프랑스어로 번역도 했다.

'삼포 가는 길'이나 '한씨 연대기' 같은 작품은 참 좋다.

뭐랄까, 그는 한국인의 상처를 구체적으로 잘 건드린다.

그의 작품을 번역하기 전 직접 만나고 싶어서 70년대 말 그를 조선호텔에서 잠시 만나 대화하기도 했다.

군사정권 시절이어서 그가 감시를 우려하며 불안해하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 (리베라산 교수) 황석영의 '한씨연대기'는 지금 한국학 전공 학생들에게도 인기 교재다.

쳤다.

한국 현대사가 잘 녹아있는 작품이라 학생들이 수업 중에서 과제를 할 때 많이 택하는 소설이다.

-- 한국학도로 한국에 처음 가보니 어떻던가.

▲ 한국에 처음 간 게 1971년이다.

한국에 절대 실망하지 않았다.

마음이 참 편했다.

내 고향 노르망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던 귀뚜라미 소리가 정겨웠고, 서울의 구석구석 엿을 팔러 다니는 엿장수 소리도, 지게꾼이 연탄을 지고 다니던 모습도 좋았다.

(오랑주 교수는 오래전 서울에서 사 왔다는 엿장수의 큰 가위를 꺼내 들고 "엿사세요"라고 외치며 웃었다). 왁자지껄 1차 2차 3차로 몰려다니며 술 마시는 한국 사람들도 재미있었다.

내가 외국인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서울이 좋아서 정말 구석구석 엄청나게 걸어 다녔다.

서울대가 동숭동에 있을 때 연구차 체류하고 있었는데, 학생들이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시위도 인상적이었다.

책상과 의자를 강의실에서 꺼내와 도로에 바리케이드를 쌓았는데, 나는 파리에서 격렬한 68혁명을 겪은 뒤라 한국 대학생들이 시위를 참 얌전하게 한다고 생각했다(웃음). 그래도 최루탄 냄새는 꽤 강렬했다.

-- 한국이 너무 빨리 변하지 않나.

▲ 그렇다.

한국의 옛것들이 참 아름다운 것이 많은데 금방 사라진다.

서울에 있을 때 자주 산책하던 곳에 오래된 성곽이 남아 있었는데 언젠가 다시 가보니 주차장으로 바뀌었더라. 프랑스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작고한 디자이너 앙드레 김과도 가까웠는데, 그의 경복궁 옆 부티크 근처의 한옥에 살던 한 친구가 있어서 자주 놀러 갔다.

마루와 기와가 참 아름다운 집이었는데 그 집도 없어졌더라.
-- 한국에서 딸을 입양하기도 했는데.
▲ 내 딸이 지금 나이 쉰인데 두 살 때 한국에서 입양해 데려왔다.

우리 집에 처음 와서 배가 많이 고팠는지 허겁지겁 먹던 딸의 모습이 생각난다.

키우면서 한국에 대해 알려 주려고 많이도 노력했는데 잘 안됐다.

딸은 한국에 여전히 큰 관심이 없고, 오히려 사위가 한국 관련 모임에도 열심히 참여하며 열성을 보인다.

한국에 별 관심을 두지 않는 것도 딸의 자유라 생각하고 이제 별말 안 한다.

[인터뷰] 60년 한국 사랑 외길, 프랑스 원로 한국학자 마크 오랑주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