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넬을 만든 것은 '코코 샤넬'이 아니었다
“샤넬 제국 일궈낸 진정한 주역, 패션디자인계의 전설 되다”

19일(현지시간) 명품 브랜드 샤넬의 수석 디자이너 카를 라거펠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전 세계 언론은 앞다퉈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속보를 내보냈다. 이들 대부분은 그가 특유의 예술 감각을 통해 샤넬을 키워낸 사연을 조명했다. 하지만 라거펠트의 탁월한 비즈니스 감각을 언급한 경우는 드물었다. 샤넬의 디자인을 전두지휘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진 그는 이탈리아 브랜드 펜디와 자신의 이름을 딴 ‘카를 라거펠트’ 브랜드를 동시에 이끄는 높은 사업 수완을 보여줬다. 뿐만 아니라 평생에 걸쳐 출판계, 영화계, 식품계 등 여러 산업을 넘나드는 사업 활동을 이어갔다. 라거펠트의 탁월한 기업가 정신이 없었다면 샤넬 브랜드가 지금과 같은 성공을 구가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평가까지 나온다.

라거펠트는 브랜딩의 중요성을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는 자기 자신을 비롯해 손이 닿는 모든 것을 브랜드로 승화시키는 능력이 있었다. 그의 상징과도 같은 포니테일 스타일 백발과 검정 선글라스는 라거펠트가 자신을 브랜딩하는 데 활용한 대표적 소품이다. 알파벳 C자가 교차된 샤넬 특유의 로고도 라거펠트의 작품이다. 그는 “오늘날 로고는 비즈니스와 마케팅의 핵심이다”라고 말했다.
샤넬을 만든 것은 '코코 샤넬'이 아니었다
샤넬의 설립자인 가브리엘 ‘코코’ 샤넬이 오늘날 널리 알려지게 된 것도 라거펠트의 탁월한 브랜딩 전략 때문이라는 평가다. 라거펠트는 코코 샤넬의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직접 제작하고 그의 이름을 딴 상품을 샤넬 제품군 전면에 내세웠다. 그의 노력으로 코코 샤넬은 샤넬 브랜드의 상징으로 다시 태어났다. 20세기 초 프랑스 파리를 무대로 활동한 젊은 디자이너 코코 샤넬의 이야기는 세계인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라거펠트는 미래의 성공을 위해서는 과거의 영광에 집착해선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샤넬은 라거펠트를 디자이너로 영입했던 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과거 코코 샤넬이 고수했던 고풍스러운 디자인 기조를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 결과 샤넬은 과거의 영광을 뒤로 한 채 점차 대중에게서 멀어지게 됐다. 라거펠트는 당시를 회상하며 “70년대에 샤넬은 의사 사모님들이나 입는 덜떨어진 브랜드로 인식되고 있었다”고 말했다. 라거펠트는 샤넬의 과거 디자인 콘셉트를 과감히 버리고 디자인에 산뜻한 재미를 더하는 시도를 이어나갔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트위드 미니스커트도 이때 만들어졌다.
샤넬을 만든 것은 '코코 샤넬'이 아니었다
라거펠트는 단기 성과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자세도 견지했다. 그는 살아 생전 경영진과 회사 매출이나 단기 성장률에 대해 거의 이야기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라거펠트는 BBC 인터뷰에서 “내 일만 잘 하면 성과는 알아서 따라올 것”이라고 말했다. 성과에 연연하지 않고 정진한 그의 업무 스타일은 샤넬 브랜드의 견조한 성장세를 이끈 것으로 분석된다. 2017년 유한회사로 공시 의무가 없던 샤넬은 이례적으로 연간 실적을 발표했다. 라거펠트의 디자인이 이끌어낸 성과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였다. 당시 샤넬은 전년보다 11% 증가한 96억달러(약 11조)에 달하는 매출액을 내보이는 기염을 토했다. 업계 1위 루이비통과 맞먹는 수준이었다.

간혹 상식을 뛰어넘는 시도를 통해 큰 성과를 이룬 경우도 있다. 그는 위험성이 높은 사업에 큰 기회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라거펠트는 2004년 기성복 브랜드인 H&M과 협업을 진행했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명품 브랜드와 값싼 기성복 브랜드가 함께 사업을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라거펠트의 시도 이후 명품 업계에서는 기성복 브랜드와 협업하는 유행이 생겨나기까지 했다. ‘럭셔리 민주주의’라는 신조어가 탄생하기도 했다. 라거펠트는 이후 “고민을 많이 했지만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했다”고 말했다. 라거펠트는 평소에도 파격적인 시도를 통해 높은 성과를 이뤄내는 것으로 정평이 난 인물이었다. 그가 기획한 패션쇼들은 쇼핑몰, 해변, 우주를 넘나드는 다양한 콘셉트로 높은 인기를 누리곤 했다.
지난 10월 프랑스 파리 그랑팔레에서 진행된 2019 S/S 패션쇼에서 라거펠트는 해변 콘셉트를 선보였다.
지난 10월 프랑스 파리 그랑팔레에서 진행된 2019 S/S 패션쇼에서 라거펠트는 해변 콘셉트를 선보였다.
한편 라거펠트는 외골수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하나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가차 없이 비판하고 만족스러울 때까지 작업했다. 간혹 거침없는 그의 발언이 문제를 일으킨 경우도 있다. 그는 한때 샤넬의 디자인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옷이 당신에게 어울리는지 고민하기 전에 당신이 그 옷에 어울리는 사람인지 먼저 고민하십시오”라고 말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가 디자인 업계에서 대체 불가능한 독보적인 존재라는 사실 때문에 보다 마음껏 자기 생각을 표출할 수 있었다는 후문이다.

정연일 기자 ne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