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정국이 한치 앞을 가늠하기 힘든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다. 세르조 마타렐라 대통령이 반(反)유럽연합(EU) 성향의 파올라 사보나 재정경제장관 후보자 임명을 거부한 뒤 주세페 콘테 총리 내정자가 27일(현지시간) 전격 사퇴한 데 따른 것이다. 의원내각제 국가인 이탈리아는 올해 총선을 다시 치를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다.

마타렐라 대통령은 무정부 상태를 막기 위해 28일 카를로 코타렐리 전 국제통화기금(IMF) 집행이사를 임시 총리로 지명했다. 과도 중립 내각을 구성해 조기 총선 이전까지 국정을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EU, 反유로 성향 장관 불승인 ‘환영’

이탈리아가 정부 구성에 실패한 것은 사보나 재정경제장관 후보자가 임명될 경우 국가 재정 건전성과 신인도가 추락할 것을 우려한 마타렐라 대통령의 반대 때문이다. 연정으로 의회를 장악한 반체제 정당 오성운동과 극우정당 동맹은 EU에 적대적 시각을 가진 콘테 총리 내정자와 사보나 장관 후보자를 앞세워 재정 지출을 늘리고 복지를 확대하려고 했다. 모두 EU 기조에 반하는 정책이다.

콘테 총리 지명 이후 극우 포퓰리즘(대중인기영합주의) 정부 출범에 대한 우려로 이탈리아 금융시장은 국채 수익률이 급등하고 주가가 폭락하는 등 요동쳤다. 국제 신용평가기관 무디스는 이탈리아 국채 등급이 현행 ‘Baa2’에서 투자등급 중 가장 낮은 ‘Baa3’로 강등될지 모른다고 경고했다. 마타렐라 대통령은 결국 재정경제장관 임명을 거부하며 “정부의 보증인으로서 시장과 투자자, 이탈리아 국민과 외국인 모두에게 불안을 주는 반EU 성향의 경제장관을 승인할 수 없다”고 밝혔다.

오성운동과 극우정당 동맹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루이지 디마이오 오성운동 대표는 “신용평가기관이 (정부 구성을) 결정한다면 투표가 왜 필요한가”라며 “헌법을 배신한 대통령을 의회가 탄핵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마테오 살비니 동맹 대표는 “이탈리아 국민의 이익을 지키려는 정부 구성 노력이 거부당했다”며 “이제 유일한 해결책은 총선을 다시 치르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탈리아, 총리 내정자 사퇴로 또 무정부 상태… 유로존 '조마조마'
◆ECB 출구전략 연기될 수도

이탈리아에서 사상 최초로 재총선이 치러질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금융시장의 충격이 지속됐다. 이날 개장 초반 1.7% 반등했던 밀라노증시는 조기 총선 우려에 다시 2% 넘게 고꾸라졌다. 이탈리아와 독일 국채 10년물 금리 차도 더 벌어졌다. 금리 격차는 2.26%포인트를 기록하며 4년여 만에 최대 폭을 기록했다.

금리 급등 여파로 이탈리아 재정이 나빠질지 모른다는 경고도 나오고 있다. 이탈리아 국가부채 규모는 지난해 2조5566억달러(약 2750조원), 국내총생산(GDP) 대비 부채 비율이 132%에 달한다. GDP 대비 부채 비율은 EU 국가 가운데 그리스 다음으로 높다. 게다가 재총선을 통해 오성운동이 다시 집권하게 되면 이탈리아 정부는 연간 1000억유로(약 127조원) 규모의 재정지출을 추가로 늘릴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탈리아 경제 규모는 독일과 프랑스에 이어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3위국으로 GDP(1조9379억달러)가 그리스(2007억달러)의 10배에 달한다. 이탈리아가 재정위기에 빠지면 EU 시스템이 뿌리째 흔들릴 가능성이 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유럽중앙은행(ECB)이 이 같은 시장 우려를 감안해 다음달 통화정책 회의에서 양적완화 종료 시점을 당초 예상보다 늦은 9월 이후로 미룰 수 있다고 전망했다. 유로존 구매관리자지수(PMI)가 지난달 55.2에서 이달 54.1로 떨어지는 등 경기 둔화 조짐을 보이는 점도 ECB의 경기 부양이 지속될 것이란 관측이 나오는 배경이다.

추가영 기자 gych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