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창업을 준비하고 있는 한 에스토니아 청년이 지난 5월23일 열린 창업 경진대회에서 자신의 사업 아이디어를 발표하고 있다. 이날 행사에는 6개 팀 50여 명이 참가했다. 타르투=이동훈 기자 leedh@hankyung.com
스타트업 창업을 준비하고 있는 한 에스토니아 청년이 지난 5월23일 열린 창업 경진대회에서 자신의 사업 아이디어를 발표하고 있다. 이날 행사에는 6개 팀 50여 명이 참가했다. 타르투=이동훈 기자 leedh@hankyung.com
온라인 농장 관리 솔루션 업체인 바이탈필즈가 2011년 문을 열 때 타깃 고객은 농부가 아니라 서핑족(族)이었다. 바람을 예측하는 기술을 활용해 서핑하기 좋은 해변을 찾아주는 서비스를 선보였다. 하지만 이용자는 거의 없었다.

사업을 접기 직전, 액셀러레이터의 도움을 받아 기존에 개발한 날씨 예측 기술을 농업에 접목해보기로 했다. 날씨가 병충해에 큰 영향을 준다는 것에 주목해 ‘병충해 예측 솔루션’을 내놨다. 하지만 유료 가입자는 거의 없었다. 투자를 검토하던 런던 벤처캐피털도 줄줄이 계획을 철회했다. 일부 공동 창업자는 회사를 떠났다.

‘실패’를 인정하고 모든 걸 포기하려던 순간, 에스토니아 정부 산하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 투자펀드인 스마트캡으로부터 25만유로를 투자받았다. 가뭄 속 단비였다. 이 돈으로 농장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무를 기록하고 인력·설비 등을 관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인 ‘필드북’을 개발했다.

두 번의 실패 끝에 내놓은 필드북은 대성공을 거뒀다. 창업자들은 지난해 세계 최대 종자회사인 몬산토에 바이탈필즈를 매각해 떼돈을 벌었다. 마틴 랜드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는 “실패한 스타트업이란 낙인이 붙었다면 지금의 바이탈필즈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망해도 다시 설 수 있다"…실패해도 격려하는 문화가 '창업 붐' 원동력
◆“실패를 격려해주는 문화”

현지 기업인들은 에스토니아가 유럽을 대표하는 ‘스타트업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실패를 용인하고, 더 나아가 실패를 격려해주는 문화’를 꼽는다. 자신이 만든 기업이 쓰러지는 과정에서 배운 경험과 지식이 더 나은 회사를 만드는 데 밑거름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몇 번 실패했더라도 ‘다시 도전하겠다’는 굳은 의지와 좋은 사업 아이디어만 있으면 언제든 재기할 수 있다”(하이디 카코 에스토니아 엔젤투자협회 대표)는 얘기다.

그래서 에스토니아 스타트업 창업자들은 자신의 실패 경험을 부끄럼 없이 드러낸다. 카코 대표도 자신을 소개하는 공식 자료에 ‘두 차례의 실패’를 넣었다. 실패에 대해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는 자리도 많다. 대규모 스타트업 행사에는 항상 실패 사례를 공유하는 세션이 따로 마련된다. 아예 실패 경험을 가진 스타트업 대표끼리 모여 사례를 연구하는 세미나가 정기적으로 열릴 정도다.

카코 대표는 “최근 사업에 실패한 한 창업자는 아예 ‘실패 기자간담회’를 열기도 했다”며 “이를 통해 실패의 상처를 치유하고 재기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고 말했다.

에스토니아에 실패를 격려해주는 문화가 자리 잡은 데는 이웃 나라 핀란드가 큰 영향을 줬다. 핀란드는 ‘실패를 통해 배우자’는 의미로 매년 10월13일을 ‘실패의 날(Day for Failure)’로 지정해 기념행사까지 열고 있다.

실패를 큰 자산으로 여기는 사회 분위기에 힘입어 재도전에 성공한 스타트업이 속속 나오고 있다. 영업관리 솔루션 업체 ‘파이프드라이브’가 대표적이다. 애완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을 위한 소셜미디어인 ‘유나이티드 독스&캣츠’를 운영하다가 부도를 낸 사람들이 재창업한 이 회사는 에스토니아의 국가대표급 스타트업으로 성장했다. 최근 독일 다임러로부터 투자받은 배달 로봇 제조업체 스타십테크놀로지의 주요 간부도 수차례 실패를 겪은 사람들이다.

◆창업을 두려워하지 않는 젊은이들

에스토니아 대학생들은 창업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망하더라도 ‘실패한 창업가’가 아니라 ‘창업을 경험한 대학생’으로 인정받기 때문이다. 마르트 헬마 에스토니아엔터프라이즈(EAS) 부국장은 “에스토니아 대학생의 절반 이상은 취업이 아니라 창업을 택한다”며 “별다른 대기업이 없는 에스토니아에서 백만장자가 되는 유일한 방법은 창업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주요 대학은 사무공간과 실험실을 무료로 내주는 등 대학생들의 ‘창업 열풍’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멕토리’라는 창업 비즈니스 센터를 운영하는 탈린공과대학이 대표적인 예다. 이 대학은 다국적 기업과 손잡고 대학생들이 창업할 수 있는 공간과 멘토 서비스 등을 제공하고 있다. 타르투대학도 매 학기 아이디어랩이라는 창업 지원 시스템을 통해 우수 창업 팀을 선발한 뒤 국제 대회에 출전시키고 있다.

지역사회도 대학생들이 창업을 위해 모일 수 있는 사무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수도 탈린과 제2의 도시 타르투는 각각 ‘리프트99’와 ‘스타트업 허브’라는 사무공간을 만든 뒤 예비 창업자들이 저렴한 가격에 사용하도록 지원하고 있다. 아이디어 경진대회 같은 각종 행사도 정기적으로 연다.

크리스털스페이스라는 스타트업을 공동 창업한 타르투대생 야뉴스 칼데는 “교수들이 멘토를 자처해 학생들의 창업을 돕는다”며 “에스토니아 대학생들은 지역사회로부터 ‘더 큰 성공을 위해 얼마든지 도전하라’는 특권을 부여받은 셈”이라고 말했다. 대기업에 취업하기 위해 학점, 외국어 등 스펙 쌓기에 열중하는 한국 대학생과는 180도 다른 모습이다.

■ 세계 3위

2015년 기준 에스토니아의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 순위. PISA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3년마다 전 세계 15세 학생들의 기술과 지식을 평가하는 프로젝트다. 평가 영역은 읽기, 수학, 과학 세 분야다. 2015년 1위는 싱가포르, 2위는 일본이었다. 한국은 11위에 머물렀다.

탈린·타르투=이동훈/유창재 기자 leedh@hankyung.com

후원:삼성언론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