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리스크'에 1천800여 한국기업 비상…"불확실성에 뾰족한 대책 없어" 고심
대부분 양국 눈치 보며 '관망'…"당장은 주문물량 소화·품질경쟁력 제고 주력"


저렴한 인건비와 무관세로 미국 시장 공략을 위해 멕시코에 진출한 한국기업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설마 했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대선 기간 내걸었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ㆍ나프타) 재협상, 국경세 35% 부과 등 반 멕시코 공약을 '뚝심 있게'하나둘씩 실천에 옮기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먼저 취임한 지 이틀 만에 나프타 재협상을 추진방침을 밝히면서 멕시코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멕시코 정부가 관세나 수출입 할당(쿼터)이 부과된다면 나프타 협상을 중단하겠다는 강경 방침을 선언하며 결전 의지를 불태우고 있지만 멕시코 내 한국기업들은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대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멕시코 경제부에 따르면 현지에 진출한 한국기업은 1999년부터 작년 3분기까지 1천835곳에 달한다.

절반가량은 미 텍사스주와 인접한 국경도시에 있는 무관세 수출구역인 마킬라도라에 입주해 미국과 캐나다로 무관세 수출을 하고 있다.

지난 2일 멕시코 북서부 바하칼리포르니아노르테주(州)의 국경도시 티후아나에 있는 엘 플로리도(El Florido) 산업단지에 입주한 한국기업 9곳은 대미 수출 비중을 줄이거나 대체 시장 개발 등의 방법을 짜내고 있지만, 불확실성이 커서 선뜻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하는 모습이 확연했다.

운송용 트레일러 등을 생산하는 현대트랜스리드 관계자는 "일단은 향후 추이를 지켜봐야 할 것 같다"면서 "본사에서 결정할 문제지만 구체적으로 확정된 게 없는 만큼 현재 주어진 주문물량을 소화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철강제품을 생산에 대기업에 납품하는 아주스틸 관계자는 "국경세가 부과되면 큰 대기업은 딜을 통해 버틸 수 있겠지만, 우리 같은 작은 기업은 치명타를 맞게 될 것"이라며 "뾰족한 대책이 없다"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때리고 얼르기'식 압박에 능수능란한 트럼프 대통령의 사정권에 들까 봐 두려워하는 눈치도 역력했다.

가전제품을 미국으로 수출하는 한 대기업 관계자는 "트럼프의 트자도 꺼내지 말자는 분위기"라며 "특정 국가의 정책, 특히 멕시코에 대한 투자 철회를 종용하는 트럼프 행정부가 이끄는 미국의 정책을 비판하고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눈 밖에 나 보복당할 수도 있어 언급 자체가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그러면서 "현재 직원들의 분위기는 안정적인 상황"이라면서 "트럼프 리스크에 동요하지 말고 원가절감과 혁신공정을 만들어 자체 품질경쟁력을 키우자는 분위기"라고 귀띔했다.

멕시코는 전체 수출의 약 80%, 수입의 50%를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

특히 자동차 업계는 약 80%를 미국으로 수출하고 있어 트럼프 대통령의 공약이 실현될 경우 멕시코 산업에 작지 않은 타격이 예상된다.

양국은 나프타의 무관세와 멕시코의 저렴한 인건비를 활용한 상호 보완적 분업구조를 갖추고 있다.

이런 이유로 삼성전자는 현재 미국에 수출하는 TV 물량 대부분을 멕시코 티후아나 공장에서 만들고 있다.

냉장고 등 가전제품은 멕시코 게레타로 기지에서 제조하고 있지만, 미국이 고율의 국경세를 물리면 원가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LG전자도 멕시코 레이노사 지역에서 TV를, 몬테레이 공장에서 냉장고를 생산하고 있다.

미국에서 판매되는 TV의 대부분, 냉장고는 3분의 1가량이 멕시코공장에서 만들어져 공급된다.

트럼프의 공약이 현실화될 경우 가장 큰 피해를 볼 가능성이 있는 곳은 기아차 멕시코공장이다.

멕시코 북동부 누에보레온주(州) 주도인 몬테레이에 자리 잡은 기아차 공장은 나프타를 십분 활용하기 위해 조성됐다.

지난해 5월부터 양산에 들어간 기아차 멕시코공장은 올해 25만대를 생산할 예정이다.

생산 차량 중 60%는 미국과 캐나다 등 북미로, 나머지 20%는 중남미 시장으로 각각 수출하고, 20%는 멕시코 현지에서 판매한다는 게 기아차의 구상이다.

하지만 멕시코에서 생산돼 미국으로 들어오는 제품에 35%의 관세를 매기겠다는 트럼프의 공약이 현실화된다면 기아차 멕시코공장에서 생산되는 물량 중 최대 60%가량의 판로가 막히게 된다.

애초 계획을 수정해 중남미 수출을 늘리더라도 한계가 있으므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주력 생산모델인 포르테는 대형차보다 마진율이 낮은 준중형차라 약간의 관세만 붙어도 가격 경쟁력이 떨어진다.

기아차 관계자는 "나프타 재협상과 국경세 부과는 멕시코 전체 산업과 자동차산업에 동일하게 영향을 미치므로 우리만을 표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본사서 내부적으로 시나리오별 상황을 가정해 대책을 마련하고 있지만, 관세가 오르는 등 현실화돼야 대응방안의 윤곽이 드러날 것"이라고 말했다.

기아차와 현지업체에 납품하는 한 자동차 부품업체는 1분기까지 주문량을 조정하거나 투자를 보류하며 향후 사태를 관망 중이다.

나프타 무관세를 통해 미국산 자동차를 수입, 멕시코 시장에 판매하는 현대자동차의 경우 미국이 멕시코산 제품에 관세를 부과한다면 멕시코도 보복관세를 부과할 가능성이 커 타격이 있을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현대차 관계자는 "트럼프 대통령의 공약이 실현되고 멕시코도 보복관세를 부과한다면 한국산 수입이 유리할지, 미국산 수입이 유지할지를 물류비, 관세율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결정할 것"이라며 "최소 올해 1분기까지는 사태를 관망하며 향후 대응책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멕시코에서 자동차용 아연도금 강판 공장을 운영 중인 포스코 아메리카도 당혹스럽지만, 신중히 대응방안을 모색 중이다.

포스코 아메리카 관계자는 "우리가 납품하는 멕시코 내 자동차산업에 타격이 있으면 우리도 직접 영향을 받는 구조이므로 멕시코 내 자동차 기업의 동향을 모니터링 하면서 예의주시하고 있다"며 "현재 생산에는 직접적인 영향이 없다"고 말했다.

마킬라도라에 있는 기업 중 일부는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정책과 인센티브, 미국-멕시코 간 인건비를 비교 분석해 미국 이전이 경제적일 경우 생산기지 이전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미국의 규제가 심한 만큼 차라리 국경세 부과를 감수하더라도 그대로 머물러 있겠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양국보 KOTRA 중남미 본부장은 "나프타와 국경세 등이 어떻게 현실화될지 불확실한 상황"이라면서도 "개별 기업들이 업종별 수출영향을 분석하는 것은 물론 투자, 환율, 금융 리스크를 고려한 종합적 점검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그러면서 "멕시코가 수입선을 다변화할 경우 예상되는 틈새시장을 적극적으로 발굴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티후아나연합뉴스) 국기헌 특파원 penpia21@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