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부장관 사임 촉구 항의 시위…"생식 강요 말고 출산 환경부터 만들어야"

이탈리아 정부가 심각한 저출산을 타개하기 위한 고육책으로 도입한 '생식의 날' 캠페인이 인종 차별 논란에 휘말리며 다시 한번 역풍을 맞고 있다.

일간 라 레푸블리카 등 이탈리아 주요 언론에 따르면 이탈리아 보건부가 지정한 22일 '생식의 날'을 앞두고 전날 공개된 새로운 홍보 포스터에 비난이 빗발치고 있다.

'불임을 막기 위한 건전한 생활 방식'이라는 제목의 이 교육용 포스터는 환하게 웃고 있는 4명의 젊은 백인 남녀 사진과 레게 머리를 한 흑인 등 다양한 인종이 모여 마리화나로 추정되는 담배를 물고 있는 사진을 대비시킨 채 전자에는 '장려해야 할 바람직한 습관', 후자엔 '가까이 해서는 안될 친구들'이라는 설명을 붙였다.

이탈리아 소셜미디어 이용자들은 이 포스터에 대해 "명백한 인종 차별"이라며 냉소했다.

트위터 이용자 모니카 콘주는 "불임을 피하기 위해 약물 등을 멀리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해도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된 친구 집단도 멀리해야 하느냐"고 꼬집었다.

또 다른 트위터 이용자 크리스티아노 발리는 "백인은 바람직하고, 흑인과 레게머리와 흡연자는 나쁘다는 게 이탈리아 정부의 생각인가"라며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눈썰미가 좋은 일부 사람들은 백인 젊은이들이 웃고 있는 사진이 임플란트 시술을 선전하는 치과 광고에서 따온 것이라고 지적하며 정부의 무성의함을 질타하기도 했다.

얼마 전 보건부가 진행한 '생식의 날' 캠페인 홍보가 성차별적이며, 제대로 된 일자리가 없어 결혼과 출산을 미루는 청년층을 모독하는 것이라는 지적으로 중단된 데 이어 이번에도 논란이 일자 베아트리체 로렌친 보건부 장관의 사임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이탈리아 보건부는 이달 초 '아름다움에는 나이가 없지만, 생식력에는 나이가 있다'는 문구 옆에 젊은 여성이 모래 시계를 들고 있는 사진을 담은 광고, 침대 위 이불 밖으로 커플의 발이 삐져 나온 사진을 배경으로 '젊은 부모, 창의적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문구가 담긴 광고 등을 선보여 빈축을 산 바 있다.

이탈리아 보건부는 예상치 못한 또 한 번의 반발에 대해 당초 "인종차별주의는 인종차별주의자의 눈에만 존재하는 법"이라고 주장하며 홍보 포스터에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았으나 비난이 거세지자 문제의 포스터를 회수하겠다며 한 발 물러섰다.

로렌친 보건부 장관은 또 보건부 홍보 책임자를 해임하는 한편 이런 포스터가 만들어지게 된 경위를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거듭된 보건부의 헛발질에 분노한 시민들은 이날 보건부가 개최한 '생식의 날' 행사장 밖으로 몰려와 로렌친 장관의 사임을 요구하며 항의했다.

이들은 '가짜 생식'(Fertility Fake)이라는 제목의 시위를 조직한 뒤 옷 속에 베개를 넣고 임신을 가장한 채 "정부는 생식과 임신을 강요하지 말고, 아기를 낳을 수 있는 건강한 환경과 일자리, 어린이집, 동성 커플 입양권을 먼저 갖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여성은 '나는 소득을 기다리고 있어요'라는 팻말을 들고 시위에 참여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현재 여성들의 합계 출산율이 1.39명으로 유럽연합(EU) 꼴찌인 이탈리아에서는 작년에 출생한 아기는 48만8천명에 그쳐 1861년 공화정 출범 이후 최저치를 기록하는 등 저출산 현상이 심각한 국가적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로마연합뉴스) 현윤경 특파원 ykhyun14@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