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하는게 아니라 과거 인정하고 미래 초점 맞추기 위한 것"
"정치적 용서의 부재가 세계의 인종적·종파적·국가적 분열의 중심"


웬디 셔먼 전 미국 국무부 정무차관이 27일(현지시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 원자폭탄 투하지인 히로시마(廣島)를 방문할 것을 촉구했다.

셔먼 전 차관은 특히 과거사 갈등을 빚던 한국과 일본이 지난해 12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합의한 만큼 오바마 대통령이 히로시마 행(行)을 결정하기 쉬워졌다고 주장했다.

미국 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인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의 외교 고문인 셔먼 전 차관은 이날 미국 CNN 방송에 기고한 글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히로시마에 가야한다"며 "이는 (원자폭탄 투하에 대해) 사과하는 게 아니라, 미래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과거를 인정할 용의가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미국의 이익에 이바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셔먼 전 차관은 "역사가들은 해리 트루먼 대통령의 원폭투하 결정으로 많은 미국인이 살아남았지만,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핵무기를 사용한 것을 놓고 논쟁을 계속하고 있다"며 "특히 퓨리서치 센터 등의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미국인 대다수가 원폭 투하 결정을 잘못됐다고 보는 것 같다"고 주장했다.

셔먼 전 차관은 "오바마 대통령이 히로시마를 방문할 경우 그 초점은 과거를 기억하고 세계 대전으로 이어지는 길로 다시 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데에 맞춰져야 한다"며 "동시에 우리가 1945년에 했던 일(원폭 투하)을 기억하고 다시는 히로시마가 없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한·일 양국 정부의 일본군 위안부 문제합의를 거론하면서 "양국 정상의 정치적 용기가 오바마 대통령의 결정을 쉽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양국 위안부 합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과거를 기억하겠다는 약속이었다"며 "미래 세대를 위한 교과서를 쓰면서 과거를 은폐하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양국은 역사가 현재를 기소(起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일본이 위안부 문제에 합의한 것을 '자기 이익'(self-interest)에 따른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는 "북한을 비롯해 역내에서 지속적인 도발과 긴장이 고조되는 것을 우려해 일본과 한국은 마침내 2차 세계대전의 고통스러운 장(章)인 위안부 문제에 합의했다"며 "여전히 새롭고 때로는 흔들리는 이 합의는 두 나라가 21세기에 가장 큰 안보적 도전을 주는 지역에서 연합전선을 만들어내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셔먼 전 차관은 독일이 과거 전쟁점죄를 사죄하고 배상한 이유도 '자기 이익'이 발동됐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가 1970년 12월 폴란드 바르샤바의 유대인 게토 추모비 앞에 무릎을 꿇고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기에 앞서 전후 첫 총리였던 콘라드 아데나워가 냉전 초기 소련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적국이었던 프랑스와 손을 잡았던 사례가 있었다고 그는 지적했다.

셔먼 전 차관은 그러면서 "정치적 용서의 부재가 오늘날 세계에서 인종적이고 종파적이며 국가적 분열을 일으키는 중심에 있다"며 "역사와 대면하고 그것을 뛰어넘지 못하는 무능함은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지속적으로 안보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밝혔다.

셔먼 전 차관의 논리는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행이 전쟁 당사국들과 피해국들이 '과거'를 분명히 인정하고 '미래'로 초점을 맞춰나간다는 측면에서 그 의미가 크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일본 정부가 일본군 강제동원 사실을 여전히 부인하고 역사수정주의적 태도를 보이는 분위기 속에서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은 자칫 일본의 '가해국' 이미지를 불식하고 '피해국' 이미지를 부각하는 역작용이 나타나지 않을까 우려하는 목소리가 주변국에서 적지 않다.

오바마 대통령이 히로시마를 방문하더라도 '핵없는 세상'의 구현이라는 인류보편적 의제에 초점을 맞추되, 일제의 전쟁범죄와 과거사가 결코 지워질 수 없는 것임을 분명히 하는 메시지 관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미국 내에서도 제기되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조만간 다음 달 26∼27일 일본 미에(三重)현 이세시마(伊勢志摩)에서 열리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참석하는 계획을 발표하면서 히로시마 방문 일정도 함께 공개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워싱턴연합뉴스) 노효동 특파원 rhd@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