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시청률·클릭수로 언론 요리…생존 급한 언론은 별수없이 거품 경쟁
NYT, '트럼프와 공생관계' 우울한 언론 자화상 그려…

막말과 독설, 터무니없는 공약으로 시청률과 조회 수를 급상승시키는 미국 대선 공화당 선두주자 도널드 트럼프의 힘이 트럼프와 미국 언론간 유례없는 공생관계를 낳고 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21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와 뉴스매체의 상호의존'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인터넷과 모바일 시대에 전통적인 수입구조를 대체할 안정된 수입원을 찾지 못한 미국 언론 매체들이 전통의 언론 규범을 깨뜨리면서까지 트럼프에 매달려야 하는 우울한 자화상을 그렸다.

트럼프가 한차례 충돌했던 폭스뉴스 여성 앵커 매긴 켈리에 대해 지난 18일 다시 트위터에서 "역겹고 과대평가된" 인물이라고 공격한 데 대해 폭스뉴스가 "병적인 집착"이라고 반격한 2차 충돌이 트럼프와 매체 간 공생관계의 전형적인 사례다.

뉴욕타임스는 2차 충돌에 따른 트럼프 뉴스의 홍수를 가리켜, "모두가 (눈에 보이지 않는 심각한 내상 가능성은 논외로 하고) 이득을 봤다"고 지적했다.

트럼프는 유세에 애용하는 `악당(켈리)'을 만들어 분노한 지지자들을 규합하면서 모든 뉴스의 중심에 섰다.

폭스뉴스는 공화당 기관방송이라는 비아냥을 떨치고 언론으로서 독립성을 과시하는 기회가 됐다.

앵커 켈리는 높은 시청률 예약으로 회사로부터 든든한 지원을 받는 것은 물론 트럼프와 충돌 후 수백만 달러의 수입을 올려준 자신의 저서 판매량을 더욱 늘리게 됐다.

각종 신문과 온라인 뉴스매체들도 휴대전화에서 조회 수 올리는 데 안성맞춤인 얘깃거리를 찾았다.

시청자와 독자들도 자신들 입맛에 맞는 것을 최대한 신속히 전달하려고 몸부림치는 언론사들의 경쟁의 득을 봤다.

독자들은 트럼프를 찾고 있다.

대통령 선거의 해에 후보자들과 언론 매체들이 호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늘 있는 일이지만, 이번엔 트럼프라는 특정 인물에만 집중됐고, 더구나 '돈'이 언론과 정치의 영역에 이 정도로까지 얽힌 예가 없다고 뉴욕타임스는 특이성을 지적했다.

트럼프는 과도기 허약한 재정상태에 놓인 미국 언론산업의 약점을 간파해 활용하고 있다.

전통적인 신문·방송이든 신생 인터넷 매체이든 불안정한 수입원 때문에 생존경쟁에 내몰린 형편에 시청률과 조회 수를 올리는 트럼프는 당장 재정난을 덜어줄 고약인 셈이다.

트럼프 자신도 이를 의식하고 있는 것은 그가 수주전 한 언론 인터뷰에서 "내가 이들 프로그램 가운데 어느 한 곳에 나가면 시청률이 2배, 3배 뛰어오른다.

그게 힘이다"라고 말한 것에서 드러난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출범 때부터 보수층만 겨냥, 전통적인 언론 가치관과 결별한 덕분에 24시간 케이블뉴스 매체 중 1위 자리에 오른 폭스뉴스는 앵커 켈리 덕분에 마치 트럼프에 대한 '저항 전선'의 선봉장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다른 프로그램들에선 트럼프 특집을 많이 다루면서 그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황금시간대 시청률이 지난해보다 40% 급상승하는 데 기여했다.

불과 1년 반 전만 해도 20년래 최저의 시청률로 인해 과연 새로운 언론 생태계에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의심받던 CNN은 후보토론회와 트럼프에 대한 집중보도 덕분에 올해 시청률이 170% 급상승했다.

심장에 아드레날린 주사를 놓은 격이다.

TV토론 중계 때 30초당 20만 달러(2억3천만 원)를 벌어들여 평상시의 40배에 이르니, CNN 월드와이드 사장 제프 저커가 환한 얼굴로 "숫자가 미쳤다, 미쳤어"라고 연발한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신문은 말했다.

트럼프가 뉴스에서 다뤄지는 시간, 즉 그가 누리는 "공짜 미디어"의 가치를 환산하면 거의 19억 달러어치에 이른다.

공화당 2위 주자인 테드 크루즈는 3억 달러, 민주당 1위 주자인 힐러리 클린턴은 7억5천만 달러에 약간 못 미친다.

4개 주에서 경선이 치러진 지난 8일 모든 케이블뉴스 매체들이 트럼프의 기자회견을 45분간 처음부터 끝까지 생중계하는 '장관'도 펼쳐졌다.

반면 클린턴의 경선 승리 연설은 완전히 외면당했다.

공급자 시장에서 트럼프의 힘은 이뿐이 아니다.

ABC 방송은 후보토론회 공동주최 신문사와 결별했다.

ABC 방송은 양자 관계의 문제 때문이라고 설명했으나 트럼프가 자신에게 비판적인 이 신문과 공동주최 관계를 끊으라고 요구했던 터라 그 요구를 수용한 것처럼 비쳤다.

각 방송사들이 일요일 아침 편성하는 '페이스 더 네이션' '미트 더 프레스' 같은 프로그램들은 후보자들을 직접 불러내 카메라 앞에 앉혀 놓고 보좌진 도움 없이 답변토록 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전화로만 '출연'하겠다는 트럼프의 고집에 폭스뉴스만 제외하고 모든 방송사가 굴복했다.

뉴욕타임스는 자신들을 포함해 "신문도 마찬가지"라며 디지털 독자층 발굴·확대라는 욕망에서 트럼프 거품을 키우는 데 한몫하고 있다고 자인했다.

트럼프가 지난주 앵커 메긴 켈리에 대해 "미친 메긴"이라고 트위터에 올렸을 때 이미 여러 차례 되풀이된 일이기에 뉴스거리가 아니었음에도 뉴욕타임스, 워싱턴 포스트, 폴리티코를 비롯해 각 신문들이 별도 뉴스로 다룸으로써, 트럼프의 말을 팔로워 700만 명 너머로 퍼뜨려준 게 단적인 예이다.

트럼프는 "내가 어떤 것에 대해 트윗을 날리면 별것도 아닌데 언론들이 수초 만에 속보로 다루니, 세상에서 제일 미친 짓"이라고 말했다고 뉴욕타임스는 자조했다.

(서울연합뉴스) 윤동영 기자 ydy@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