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 위기는 항상 기회였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독일 경제는 이듬해 5.1% 뒷걸음질쳤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최악의 침체였다. 하지만 2010년 4.2% 성장하며 전 세계 주요국 가운데 가장 빨리 위기에서 벗어났다. 이후 유럽연합(EU) 평균보다 높은 경제성장률을 유지하며 ‘경제 슈퍼스타’ ‘유럽의 절대 강자’란 수식어가 따라다니게 됐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도 독일은 위기 상태였다. 실업률이 11%까지 오르자 ‘유럽의 병자’란 말이 나왔다. 독일은 그때도 위기를 기회로 활용했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가 이끌던 집권 사회민주당(SPD)은 노동·복지 개혁을 추진했다. 위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절박함에 야당인 기독교민주당(CDU)도 뜻을 보탰다. 개혁은 성공적으로 추진됐고 독일 기업은 유럽에서 가장 높은 경쟁력을 갖게 됐다.
[병자에서 강자로 부활한 독일] 독일, 노동 유연성 높였더니 실업률 12%→6%로 '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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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시장 유연화에 실업률 ‘뚝’

2000년대 초반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독일산(産), 이젠 안녕’이란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많은 독일 기업들이 높은 노동비용을 피해 인접한 동유럽 국가로 공장 이전을 추진한다는 내용이었다. 1990년 독일 통일 이후 근로자 임금은 빠른 속도로 올랐다. 해고와 비정규직 고용이 어려운 경직된 노동시장 탓에 독일 기업들은 신규 고용을 꺼렸다. 1991년 7.3%였던 실업률은 2003년 11.7%까지 올랐다.
[병자에서 강자로 부활한 독일] 독일, 노동 유연성 높였더니 실업률 12%→6%로 '뚝'
독일 실업률은 작년 11월 기준 6.3%다. 프랑스(10.8%) 이탈리아(11.5%) 스페인(21.6%)보다 훨씬 낮다. 2003년 노동시장 유연화와 시장논리 강화를 골자로 추진한 ‘하르츠 개혁’ 덕분이다. 월 400유로(약 51만원) 미만의 급여를 받는 저임금 일자리인 ‘미니 잡’과 월 400~800유로의 급여를 받는 ‘미디 잡’ 등 시간제 일자리가 대거 생겨났다. 기업들은 미니 잡 노동자에 대해서는 세금과 사회보험료를 내지 않아도 돼 비용을 아낄 수 있었고, 주부들은 짬을 내 돈벌이를 할 수 있게 됐다.

정규직 일자리 임금은 2001년부터 2010년 사이 연평균 1.1%씩 올랐다. 강유덕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유럽팀장은 “물가상승률을 감안한 독일의 실질 임금 상승률은 1999~2008년에 연평균 -0.5%였다”며 “독일 기업들의 수출 경쟁력이 높아지면서 경상수지 적자가 흑자로 완전히 탈바꿈하는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탄탄한 제조업에 경제 회복 빨라

독일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경상수지 흑자 규모는 2013년 6.5%에서 2014년 7.6%로 증가했고, 작년엔 폭스바겐 배기가스량 조작 사태에도 불구하고 7.9%로 사상 최대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선진국 가운데 유난히 높은 제조업 비중 덕분이다. 독일의 제조업 비중은 GDP 대비 23%로, 일본(19%) 이탈리아(15%) 미국(12%) 영국(11%)을 웃돈다.

류상윤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은 “독일이 ‘슈퍼스타’로 세계의 주목을 받는 이유는 제조업 경쟁력에서 찾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2000~2012년 전 세계 수출액에서 일본 제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7.8%에서 4.7%로 떨어졌지만, 독일은 9% 내외의 비중을 유지했다.

독일에는 세계 시장 1위, 또는 점유율 50% 이상인 제품을 생산하는 중견기업(미텔슈탄트)이 1300여곳에 달한다. 미텔슈탄트는 독일 전체 노동력의 70% 이상을 고용하고 GDP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조호정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탄탄한 제조업 기반 덕분에 독일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도 경기 회복이 매우 빨랐다”며 “연이은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재정위기에도 수출이 2011년 이후 매년 1조유로를 달성, 경제의 안정성이 돋보였다”고 평가했다. 유로존 최대 경제대국인 독일의 2010~2013년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2.1%로, 유로존 2, 3위인 프랑스의 0.8%, 이탈리아의 -0.4%를 훨씬 웃돌았다.

독일 정부는 제조업 경쟁력을 더욱 높이기 위해 기업들과 협력, 2012년부터 독일식 창조경제인 ‘인더스트리 4.0’을 추진하고 있다. 전통적인 제조업에 정보기술(IT) 시스템을 결합해 모든 생산 공정이 지능화된 일종의 ‘스마트 공장’을 구축하도록 한다는 전략이다. 스마트 공장이 되면 자동차 공장의 경우 생산 단계에서부터 구매자의 체형과 취향에 맞는 자동차를 조립할 수 있다. 이미 세계에서 제조업 생산성이 가장 높은 독일은 ‘인더스트리 4.0’으로 생산성을 30%가량 향상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손잡은 여야, “경제가 우선”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독일 경제 부활의 원동력으로 실용주의 문화를 주목했다. 여당과 야당, 기업과 노동자 간에 이념 대립보다 실리를 추구하는 태도가 합의와 협력을 이끌어낸 원동력이 됐다는 얘기다. 1998년 16년 만의 정권 교체로 집권당이 된 사회민주당은 좌파 성향이었지만 경제를 살리기 위해 기업 친화적인 정책을 폈다. 2006년 총선에서 정권을 잡은 우파 성향의 기독교민주당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사회민주당과 손을 잡고 슈뢰더의 개혁을 유지했다.

기업과 노동자도 처음엔 다툼이 있었지만 곧 고용 유지를 최우선하는 대신 노동 비용을 줄이는 방식으로 타협했다. 최악의 불황이었던 2009년 실업률이 9.1%로 전년 대비 0.4%포인트 증가에 그친 것도 기업과 노조가 임금을 깎는 대신 단축 근무를 하는 ‘일자리 나누기’에 합의한 덕분이다.

지난해 독일이 100만명 넘는 난민을 받아들인 배경에도 실용주의가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 5년 동안 독일 인구 1000명당 신생아 출산율은 8.2명으로 일본(8.4명)보다 낮다. 20~65세 노동가능인구비율은 현재 61%에서 2030년 54%로 떨어져 극심한 노동력 부족 현상이 예상된다. 도이치뱅크는 난민 유입 덕분에 소비가 크게 증가할 것이라며 독일의 올해 경제성장률을 1.7%에서 1.9%로 올려잡았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