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포퓰리즘에 빠진 국회

발의 건수로 의원 평가…인기 끌것 같으면 '베끼기'
투자활성화 법안은 '기업에 특혜준다' 툭하면 폐기
[브레이크 없는 의회 권력] 골목상권 보호…청년 고용…표 노리고 쏟아진 '붕어빵 법안'

지난해 국회에는 ‘청년고용촉진특별법’ 개정 입법안이 무더기로 올라왔다. 공기업과 민간기업이 신규 인력을 뽑을 때 청년층을 일정 규모 이상 의무적으로 뽑아야 한다는 내용의 법안이다. 오제세·장병완(이상 민주당)·윤영석(새누리당) 등 세 명의 의원이 작년 5월30일 처음 입법안을 낸 것을 시작으로 9월까지 11건의 입법안이 쏟아졌다. 공동 발의로 이름을 올린 의원만 261명이다. 그런데 11건의 입법안은 발의자만 다를 뿐 내용은 ‘붕어빵’이나 다름없다. 청년인력 의무 채용 규모를 정원의 3%로 할지, 5%로 할지만 차이가 날 뿐이다.

민주당 문재인 의원과 박홍근 의원이 각각 대표 발의한 입법안을 보자. 두 의원의 입법안은 맨 앞부분 ‘제안 이유’만 다를 뿐 법안 내용은 흡사하다. △제4조 제2항 제3호 중 ‘채용’을 고용’으로 하고… △제5조의 제목 중 ‘확대’를 ‘의무’로 하고, 같은 조 제1항 중 ‘지방공기업 중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공공기관과 지방공기업’을 ‘지방공기업’으로, ‘고용하도록 노력하여야’를 ‘고용하여야’로 한다 등의 대목은 자구까지 똑같다. 이에 대해 문재인 의원실 관계자 등은 “청년실업 문제를 해소하려는 생각을 가진 의원이 많았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여의도 정가에서 ‘법안 베끼기’가 횡행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표(票)심을 움직일 수 있는 법안일수록 베끼기 대상이 된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새누리당 모의원실 보좌관은 “언론, 시민단체 등에서 국회의원을 법안 발의 건수로 평가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법안 베끼기를) 할 수밖에 없다”며 “좋은 평가를 얻기 위해 인기를 끌 만한 법안을 경쟁적으로 내놓는 것”이라고 털어놨다.

청년고용촉진특별법 개정 입법안이 11건이나 쏟아진 배경도 결국엔 ‘표’에 있다. 의원들이 청년고용촉진특별법 개정안을 잇따라 발의한 작년 5~9월은 대통령 선거전이 한창 달아오를 때였다. 정부 부처의 S국장은 “의원들이 표를 의식해 경쟁적으로 법안을 발의하다 보니 베끼기 법안도 많다”며 “자신이 낸 법안 취지를 잘 모르는 의원도 있다”고 지적했다.

19대 국회 들어 이 같은 ‘유사 입법’, ‘베끼기 입법’ 사례는 수두룩하다. 특히 작년 하반기부터는 경제민주화와 관련한 이슈에 유사 입법이 쏟아지는 추세다. 올해 1월1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이 그런 사례다. 골목 상권을 보호하기 위해 대형마트와 SSM(기업형 슈퍼마켓)의 영업일수·영업시간을 규제하는 내용을 담은 대표적인 경제민주화 법안이다. 이 법안을 처음 발의한 이는 새누리당 손인춘 의원이다. 작년 5월30일 손 의원이 이 법을 내놓자 19명의 의원이 유사 법안을 발의했다. 작년 7~8월에는 4~5일에 한 건씩 비슷한 법안이 나왔을 정도다.

최근 남양유업 사건이 터진 직후 여야 의원 5명이 ‘발빠르게’ 가맹점사업자의 불공정 거래를 처벌하는 법안(하도급거래 공정화법 개정안, 공정거래법 개정안)을 내놓은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지금처럼 대동소이한 수십개 법안을 내는 중복 입법 행태는 소모적이고 비효율적”이라며 “국회 입법이 마치 개별 의원의 경연장처럼 남용되는 경향이 있다”고 꼬집었다.

과도하게 인기 영합성 입법 경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해프닝’도 벌어진다. ‘공기업 채용 때 청년층을 3% 의무적으로 채용해야 한다’는 청년고용촉진특별법 개정안의 경우 지난달 국회를 통과한 직후 30대 구직자들로부터 집중 포화를 맞았다. 청년의 범위를 15~29세로 정한 내용 때문에 역차별을 당할 수 있다며 30대들이 강하게 반발했다. 해당 법을 당론 발의한 민주당 장하나 의원 홈페이지는 한동안 항의성 글로 도배됐다. 20대 표심을 얻으려다 30대의 반발을 사는 ‘역풍’을 맞은 셈이다.

문제는 국회가 투자 활성화 등 꼭 필요한 법안은 잘 처리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지주회사의 손자회사가 증손회사를 만들 때 확보해야 할 지분율을 낮추자는 공정거래법 개정 입법안이 그런 사례다. 2009년 4월 이명박정부는 증손회사의 지분을 100% 확보하도록 한 규정 때문에 외국 기업과 합작사 설립에 어려움을 겪는 기업 애로를 해소하기 위해 관련 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국회는 그러나 ‘기업에 특혜를 준다’는 이유를 들어 법안을 폐기했다. (※박근혜정부는 5월 초 무역투자진흥회의를 열어 외국인 투자자와 공동으로 출자한 법인에 한해서 손자회사의 증손회사 보유 지분율을 100%에서 50% 이상으로 완화하는 내용의 외국인투자촉진법을 개정하기로 했음.)

이 법을 포함해 기업 투자 의욕을 높이기 위해 정부가 내놓은 기업 환경 개선 입법안 중 상당수도 18대 국회에서 폐기됐다.

인기 영합성 입법안에는 적극적으로 나서는 국회지만 정작 이익단체의 반발에는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곤 한다. 지난달 18일 새누리당 이운룡 의원 등 13명은 보육담당 공무원들이 어린이집 운영자의 불법행위를 단속할 수 있게 특별사법경찰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어린이집에서 아동 학대가 빈발하는 걸 막자는 취지에서다. 그러나 해당 의원들은 법안 발의 14일 만에 스스로 법안을 철회했다.

어린이집 원장들로부터 항의가 빗발치자 ‘굴복’한 것이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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