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탄 시위 확산에 정치권 자제 호소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의 타계 이틀째인 9일(현지시간) 고인에 대한 애도 물결이 이어진 가운데 정치적 유산을 둘러싼 평가로 논란이 고조됐다.

'대처리즘'으로 불리는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영국 경제를 살려냈다는 찬사와 함께 이 같은 정책이 실업자를 양산하고 양극화를 심화해 '영국병'을 키웠다는 비판이 엇갈렸다.

대처 시대의 마감을 조롱하는 규탄 시위가 영국 곳곳에서 벌어지는 등 고인에 대한 시민의 평가도 극단으로 갈린 모습을 드러냈다.

◇ 공과를 둘러싼 엇갈리는 평가 = 더타임스는 대처 전 총리가 국가적 자신감이 상실된 힘겨운 시기에 올바른 결정으로 영국을 이끌었다고 평가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도 대처 전 총리의 업적에 힘입어 영국은 숱한 개혁을 이끌며 부강한 나라가 됐다고 진단했다.

이와 달리 가디언은 대처 전 총리의 정치적 유산의 영향으로 공동체 정신이 소멸해 영국은 불필요한 분열과 갈등의 시기를 보냈다고 비판했다.

인디펜던트는 대처리즘을 국가적 재난이라고 혹평했다.

이 신문은 서유럽에서 가장 평등한 나라였던 영국이 대처 정부를 거치면서 가장 불평등한 나라로 전락했다고 꼬집었다.

대처의 전기작가인 칼럼니스트인 휴고 영은 대처 집권기는 영국에 사회통합이라는 어려운 숙제를 남겼다고 분석했다.

가디언이 여론조사 업체 ICM에 의뢰해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응답자의 50%는 대처 전 총리의 집권이 영국에 유익했다고 밝혔다.

또 응답자의 62%는 대처 전 총리가 여성의 사회 참여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데 큰 기여를 했다고 평가했다.

◇ 정치권 공방 확산 = 전날에 이어 각계에서 애도의 반응이 이어진 가운데 정치권의 공방도 확산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대처 전 총리가 기독교적 가치를 바탕으로 공익과 자유 증진을 위해 노력했다며 애도의 뜻을 발표했다.

대처 전 총리의 외교 상대였던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고인은 보기 드문 용기를 갖춘 지도자였다"고 추모했다.

대처 정부에서 장관을 지낸 모이니헌 상원의원은 "영국은 국가대표팀의 훌륭한 주장을 잃었다"며 고인이 보여줬던 확고한 정치적 신념과 추진력을 기렸다.

조지 오스본 재무장관은 "자유의 승리와 경제의 발전을 낙관하는 대처리즘의 정신은 교훈으로 삼을 부분"이라고 밝혔다.

이와 달리 노동당 소속의 켄 리빙스턴 전 런던 시장은 대처리즘을 영국이 현재 안고 있는 모든 문제의 출발점이라고 공격했다.

그는 제조업 포기에 따른 실업자 증가, 주택 파동, 금융 위기 등을 대처 정권의 책임으로 돌렸다.

노동당 존 만 의원은 대처리즘을 비판하며 10일로 예정된 하원 추모 세션에 동의할 수 없다고 반발했다.

그는 "대처 전 총리를 위해 예산을 허비하는 회의에 참석하느니 치과 진료를 받겠다"고 밝혔다.

하원의원인 조지 갤러웨이도 "대처 전 총리의 정치적 업적에 대한 논쟁이라면 모를까, 국가 예산을 쓰는 일방적인 찬양 행사에 동원되지 않겠다"고 정부를 공격했다.

◇ 대처리즘 규탄 시위 확산 = 대처리즘을 규탄하는 시위가 영국 곳곳에서 벌어져 이를 바라보는 시민들의 반응도 엇갈렸다.

런던경찰청은 이날 새벽 런던시 이스턴과 브릭스턴 등에서 대처 총리를 규탄하는 폭력 시위가 발생해 진압하던 경찰 6명이 부상하고 경찰 차량 한 대가 파손됐다고 밝혔다.

런던 도심 이스턴 지역에서는 대처 전 총리의 사망 소식에 전날 밤부터 시위대 200여 명이 몰려나와 축제 분위기를 연출하며 출동한 경찰과 대치했다.

런던 남부 브릭스턴에서는 시위대 100여명이 거리를 행진하며 대처 시대를 마감하는 자축 시위를 벌였다.

일부 시위대들은 인근 극장 외벽에 올라 현수막과 영화 홍보간판을 이용해 대처 전 총리의 사망을 조롱했다.

거리 외벽 곳곳에는 교육장관 시절 우유 무상 급식을 중단한 대처 전 총리를 겨냥해 '당신은 우유와 우리의 희망까지 날치기했다'는 내용의 거리그림도 게시됐다.

대처 정부 시절 아일랜드공화국군(IRA)과 갈등이 심했던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와 런던데리에서도 대처 전 총리의 사망을 축하하는 대규모 거리시위가 지속됐다.

이밖에 브리스톨과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등에서도 대처 시대의 마감을 기념하는 대규모 규탄 시위가 이어졌다.

프리미어리그를 포함한 영국 프로축구리그 연맹은 대처 전 총리의 업적을 둘러싼 논란이 이어지자 경기전 묵념 시간을 갖는 방안을 각 구단에 제안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IRA를 이끌었던 신페인당 소속의 마틴 맥기니스 북아일랜드 제1 부장관은 대처리즘 반발 시위가 과열 양상을 보이자 자제를 호소했다.

그는 "대처 전 총리는 평화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죽음을 조롱하는 것은 정신을 망가뜨리는 일"이라고 밝혔다.

노동당 소속 토니 블레어 전 총리도 "대처 전 총리를 모독하는 길거리 파티는 고약한 행동"이라며 "비판론자들은 정치적 신념이 다르더라도 존경심은 보여야 한다"고 충고했다.

(런던연합뉴스) 김태한 특파원 thki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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