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 성장세가 급속히 둔화되고 있다. 대부분의 예측기관들은 올해 성장률은 2%대 중반, 내년에는 3%대 초반에 그칠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잠재성장률이 3.7% 안팎인 점을 감안하면 GDP갭(실제성장률-잠재성장률) 상으로 올해는 1%포인트, 내년에도 0.5%포인트의 디플레 갭이 2년 연속 발생한다는 의미다.

각종 비관론도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 가운데 증권시장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지속 성장 여부와 관련해 ‘성장의 덫(growth trap)’에 걸릴 것이라는 시각이 고개를 들고 있어 4분기 이후 성장률이 더 주목된다. ‘성장의 덫’이란 경제발전 초기에는 유치 단계의 이점을 누리면서 순조롭게 성장하다가, 어느 순간에 성장이 정체되거나 퇴보하는 현상을 말한다.

한국처럼 뒤늦게 경제발전을 시작한 국가들은 ‘외연적 단계’에서 ‘내연적 단계’로 이행하는 것이 전형적인 성장경로다. 전자는 개발 초기에 노동 등 생산요소의 양적인 투입을 통해 성장하는 국면을, 후자는 일정시점 이후 생산요소와 경제시스템의 효율성을 제고시켜 성장하는 단계를 말한다.

한국 경제는 개발 시작 이후 주력 산업이었던 제조업의 생산여건이 급속히 악화되고 있다. 한국의 제조업 비중은 30.1%로 경제발전 정도가 한 단계 낮은 브라질(23.4%), 러시아(29.7%), 인도(21.0%)보다 여전히 높다. 서비스 산업으로의 경제구조 전환을 서두르고 있지만 제조업이 받쳐줘야 지속 성장이 가능하다. 금융위기 이후 대부분 국가들도 제조업을 다시 중시하는 산업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제조업 환경이 악화되는 것은 낮은 출산율로 생산가능인구, 특히 청년층이 감소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요인이다. 한국은 ‘루이스 전환점’에 도달한 지 오래됐다. 1990년대 후반 이후 외국인 인력에 의해 부분적으로 보완되고 있지만 인력 수요와 공급 간 만성적인 불일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

생산에 필요한 자본도 민간저축률 하락 등으로 갈수록 성장률을 제약하는 요인으로 작용한 지 오래됐다. 민간저축률이 하락하는 요인으로 정치권의 포퓰리즘적인 사회보장지출 확대, 가계는 사회안전망 강화에 따른 예비적 동기의 저축 필요성 감소와 소비여건 개선 등 비교적 구조적인 요인들이 지적되고 있다.

한국의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높아진 국제 위상에 맞게 내수시장이 발전하지 않는 것도 문제다. 특히 기업 간 불균형이 심화된 상황에서 특정 기업이 세계 최고의 반열에 올라간 것에 따른 착시현상까지 겹치면서 한국 기업이면 교역국으로부터 통상마찰의 표적이 되고 있는 점도 한국 경제 앞날을 어둡게 하는 요인이다.

앞으로 한국 경제가 ‘성장의 덫’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는 금융위기 이후 세계 경제를 이끌어가는 국가들의 동인(動因)을 감안해 성장전략을 다시 짜야 한다. 대외환경에 의존하는 한국으로서는 독자적인 성장전략을 마련한다고 하더라도 글로벌 추세에 맞지 않으면 곧바로 한계에 부딪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거시정책 기조가 분배보다 성장을 우선하는 국가일수록 높은 성장세를 유지하고, 상대적으로 분배 요구와 노조가 강한 국가는 성장률이 낮은 점이 먼저 눈에 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한국 경제 내부에서 유행처럼 확산되고 있는 경제민주화 논쟁에 대한 해외 시각이 곱지 않은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경제운영 원리로 볼 때 정부의 간섭은 최소한에 그치는 작은 정부를 지향하고,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경제주체들에 창의와 경쟁을 최대한 북돋는 국가일수록 고성장한다. 금융위기 이후 경제에 대한 국가의 간섭 정도가 커지고 있지만 불확실한 시대일수록 위기를 극복하는 방안은 ‘친기업 정책’과 ‘작은 정부론’임을 환기시키는 대목이다.

단순히 인구가 많기보다 경제연령을 젊게 유지하는 국가일수록 성장세가 빨라지고 있는 점도 눈여겨봐야 한다. 요즘처럼 공급과잉시대에 있어서는 한 나라의 성장은 시장규모와 상품 흡수능력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 미국 등이 이민정책에 적극적인 입장으로 변하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보면 쉽게 이해된다.

부존자원이 많은 국가들도 성장률이 높다. 산업별로는 수확체증의 법칙이 적용되는 정보기술(IT) 산업이 강한 국가들도 자원 부족 문제를 메울 수 있기 때문에 성장세가 빠르다. 하지만 제조업이 받쳐주지 않을 경우 경기사이클이 단기화하는 점은 주목해야 한다. IT산업도 제조업이 받쳐줘야 경제 안정과 지속 성장성을 높일 수 있다는 의미다.

영어 공용권에 속하는 국가일수록 비교적 오랫동안 안정적인 성장세를 유지하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한때 컴퓨터 등을 이용한 통역기술 발달로 영어 공용권의 정체설이 있었지만, 오히려 세계를 대상으로 비즈니스할 능력이 중요해지고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쉽지 않은 과제들이다. 그런 만큼 그 어느 때보다 경제주체들은 ‘프로 보노 퍼블리코(pro bono publico)’ 정신을 발휘해야 한다. 모두가 동참해야 ‘성장의 덫’에 빠지지 않으면서 경기와 금융시장이 안정되고,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상춘 객원논설위원 sc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