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렘린 신속 대처..푸틴 총리 부담감 클 듯

레흐 카친스크 폴란드 대통령이 10일 러시아 방문 도중 불의의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하면서 가뜩이나 불편했던 러시아와 폴란드 관계가 어떻게 될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아무리 개인 차원의 비공식 방문이라고 하더라도 외국 국가원수가 자국 땅에서 비행기 사고로 추락한 것에 대해 러시아 정부는 도의적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 당국은 사고 수습에 온 힘을 기울인다는 방침이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는 즉각 카친스키 대통령의 사망에 대해 깊은 애도를 표명했다.

또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사고 발생 직후 푸틴 총리를 사고 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하고 세르게이 쇼이구 비상대책부 장관을 현지로 급파했다.

최고의 항공기 사고 전문가들을 보내 한 점 의혹이 없도록 철저히 사고 원인을 규명하라고 지시했다.

일단 러시아 당국은 사고 원인과 관련해 테러 가능성은 배제하고 조종사 과실로 보고 조사를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지 관리들에 따르면 조종사가 안개가 짙게 낀 악조건에서 무리하게 착륙을 시도하려다 사고가 난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 이 조종사는 벨라루스 민스크로 착륙하라는 관제탑의 지시를 무시하고 4차례 스몰렌스크 공항 착륙을 시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만에 하나 이번 사고가 테러범들에 소행으로 밝혀진다면 보안 책임을 허술하게 해 외국 국가원수를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죄책감에 러시아 정부는 고개를 들 수 없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고 원인을 떠나 이날 카친스키 대통령이 소위 `카틴 숲 학살 사건' 추모 행사에 개별적으로 오려다 사고를 당한 것이어서 러시아가 이번 사고에서 마먕 자유로울 수만은 없다는 지적이다.

카친스키 대통령이 러시아를 방문한 것은 푸틴 러시아 총리의 초대를 받지 않은 상황에서 추모행사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카틴 숲 학살사건이란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0년 당시 소련 비밀경찰(NKVD)이 서부 스몰렌스크 인근의 산림 지역인 카틴 숲에서 폴란드인 2만 2천여 명을 살해, 암매장한 사건이다.

소련은 이 학살이 나치의 소행이라고 주장했으나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면서 지금까지 폴란드와 러시아 간 분쟁의 불씨로 남아있다.

푸틴 총리는 지난 7일 70주년 추모식에 도널드 투스크 폴란드 총리를 처음으로 초대해 양국 간 화해 분위기를 이끌었으나 그동안 러시아 정부를 강력히 비판해온 반공주의자 카친스키 대통령은 초대하지 않은 것.
결국, 자존심이 강한 카친스키 대통령은 희생자 가족들과 함께 별도의 추모식을 하려다 변을 당했다.

푸틴 총리로서는 폴란드 국민에게 큰 빚을 지게 된 셈이다.

그러잖아도 과거사 문제로 러시아에 대해 반감이 있는 폴란드 국민의 대(對) 러시아 정서가 급격히 악화할 수도 있을 것으로 우려된다.

폴란드는 지난해 2차대전의 기폭제로 작용한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 뒤에는 독일과 구소련 사이에 체결된 '독.소 불가침조약'이 있는 만큼 러시아가 당시 조약 체결에 대한 사과의 뜻을 표명해야 한다고 주장해 러시아와 감정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러시아 지도자들은 독.소 불가침조약을 핑계로 러시아에 2차대전 발발의 책임을 돌리는 것은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당시 국영 TV와의 인터뷰에서 "2차대전 발발 책임을 놓고 구소련과 나치 독일을 동일 선상에서 비난하는 사람들은 새빨간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고, 푸틴 총리는 "잘못된 사실을 대중의 의식에 침투시켜 국내 정치에 악용하는 것은 최악의 행위"라고 비판했다.

또 폴란드 의회는 지난해 9월 1939년 2차 세계 대전 발발 직후 소련군의 폴란드 동부지역 진입을 `대량학살'로 규정하는 결의안을 채택해 러시아의 반발을 샀다.

특히 지난 2005년 반(反) 개방 정책을 주장하는 쌍둥이 형제인 레흐 카친스키 대통령과 야로슬라브 카친스키 전 총리가 이끄는 보수 우파 정부가 들어선 이후 양국 관계는 좋지 못했다.

카친스키 대통령은 바르샤바 시장 시절인 2005년 5월 러시아인들이 가장 혐오하는 체첸 무장세력 지도자 `조하르 두다예프'의 이름을 딴 `두다예프 광장'을 조성, 러시아 내에 반폴란드 여론을 불러일으켰다.

폴란드는 러시아가 2005년 자국산 육류수입을 금지하자 그에 대한 보복으로 유럽연합(EU)과 러시아 간 동반자 협상 개시에 반대해 왔고 러시아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막겠다고 경고했다.

카친스키 대통령은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 임기 중에 폴란드의 군사현대화를 지원받는 조건으로 미국의 미사일방어(MD) 기지를 자국 내에 건설하는 데 동의해 MD를 자국 안보에 위협으로 간주한 러시아의 미움을 샀다.

이런 불화로 양국 간 정치 지도자 회담 역시 3년 가까이 열리지 못했다.

그러나 폴란드는 2007년 자유주의 성향의 중도우파 연정을 이끄는 투스크 총리가 취임하면서 양국 관계가 조금씩 호전됐다.

폴란드 정부는 러시아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반대하지 않기로 했고 이에 대한 화답으로 러시아는 폴란드에 대한 육류수입 금지 조치를 철회했다.

러시아와 불편한 관계를 가진 키친스키 대통령이 러시아 땅에서, 폴란드 국민에겐 뼈아픈 역사를 간직한 칸틴 숲 추모 행사에 참석하려다 사고를 당했다는 점에서 양국 관계는 당분간 냉담해 질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게 관측통들의 분석이다.

(모스크바연합뉴스) 남현호 특파원 hyunho@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