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금융계에서 조지 소로스만큼 극단적인 평가를 받는 사람도 드물다. 한편에서는 그를 '투자의 천재'이자 '국제적인 자선사업가'로 극찬하는 반면 다른 쪽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환투기꾼"이라고 맹비난한다.

최근에도 그는 "유로화의 미래는 불투명하다"고 언급해 유로화 가치의 논란 한가운데에 섰다.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그가 헤지펀드를 이용해 유로화 약세에 베팅해 놓고 이같은 발언을 한 것으로 잔뜩 의심하고 있다.

실제 그는 헤지펀드인 '퀀텀펀드'를 운용하면서 공격적인 환투기로 세계 경제를 뒤흔든 전력이 있다. 1992년에는 영국의 파운드화를 집중 투매하는 방법으로 단숨에 10억달러를 벌어들였다. 1998년에는 달러 강세에 베팅해 동남아시아를 외환위기에 몰아넣은 장본인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당시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총리가 그를 가리켜 '자본주의의 악마','국제적 환투기꾼'이라고 공공연하게 비난한 일은 유명한 '사건'이었다.

소로스는 그러나 이렇게 벌어들인 막대한 돈을 공산국가의 자유화와 개발도상국의 민주화에 쏟아부었다. 때로는 그런 나라의 지도자들과 경제개혁 방안을 놓고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그가 자선사업가의 영역을 넘어 '실천가'로서의 모습을 보이는 것은 그의 생애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30년 부다페스트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14세 때 아우슈비츠 가스실로 끌려갈 뻔한 위기를 겪었다. 17세부터 26세까지 젊은 시절은 영국에서 보냈지만 생활은 비참했다. 웨이터,마네킹 공장 직원 등 닥치는 대로 일하면서 모은 돈으로 런던 정경대학(LSE)에 입학한 그는 세계적인 석학 칼 포퍼를 만나 정신적으로 큰 영향을 받았다. 소로스는 칼 포퍼가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지칭한 나치즘과 공산주의를 증오하고 열린사회인 개인주의 사회를 지향했다. 1956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투자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며 1969년에 상품투자 전문가인 짐 로저스와 '퀀텀펀드'를 설립해 명성을 떨쳤다. 이 펀드의 수익률은 설립 후 20년간 연평균 34%나 됐다.

소로스는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그는 1999년 1월 대림산업이 보유하고 있던 서울증권(현 유진투자증권)을 인수했다가 2005년 말에 매각해 수백억원의 차익을 냈다. 그는 또 한국인 바이올리니스트인 제니퍼 전과 2007년 방한기간 중 결혼식을 올리기도 했다. 소로스는 현재 퀀텀펀드의 지주회사 격인 소로스펀드매니지먼트 회장과 열린사회연구소 이사장을 맡고 있다. 재산은 130억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주요 저서로는 '금융의 연금술'(1987년),'금융시장의 새로운 패러다임'(2008년) 등이 있다.

뉴욕=이익원 특파원/김태완 기자 ik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