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일본 총리 관저에서는 마지막 사무차관회의가 열렸다. 1886년 시작돼 123년간 이어진 사무차관회의가 새로운 집권 여당 민주당의 폐지 공약에 따라 없어진다. 일본의 사무차관회의는 장관들의 정례 각료회의 하루 전에 열려 주요 안건을 사실상 결정한 정책의 산실이었다.

16일 민주당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 출범으로 일본은 변혁의 회오리를 맞았다. 하토야마 차기 총리는 최근 한류스타 이서진을 만나 "(조선시대) 정조처럼 개혁정치를 하겠다"고 말했다. 지난 54년간 자민당 정권이 뿌리박은 국가의 틀을 바꾸겠다는 의지다. 하지만 하토야마 내각의 앞날에는 넘어야 할 산이 한두 개가 아니라는 지적이다.


◆인기공약 이행 어려워

하토야마 차기 총리는 신설될 부총리 겸 국가전략국 담당상에 간 나오토 대표대행,외무상에 오카다 가쓰야 간사장,관방장관에 히라노 히로후미 당 대표 비서실장,재무상에 후지이 히로히사 당 최고 고문 등을 내정한 상태다. 그는 선거 유세 때 국민 생활(복지) 중시의 경제정책과 '대등한 미 · 일 관계'라는 대외정책 변화를 약속했다. 그러나 모두 만만치 않은 과제다. 먼저 국민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경기 회복이 가능한지가 문제다. 하토야마 내각은 최악의 실업률과 재정적자라는 유산을 자민당 정권(아소 정권)으로부터 물려받았다. 자민당이 경기부양을 위해 총 132조엔(약 1700조원)의 재정을 쏟아부은 결산서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당은 월 2만6000엔의 자녀수당 신설,고속도로 통행료 무료화 등을 공약했다. 공약을 실천하는 데만 연간 16조8000억엔의 돈이 필요하다. 일본의 연간 방위예산(약 4조8000억엔)의 3.5배 규모다. 민주당은 기존 낭비 예산을 줄여 재원을 조달하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국채의 추가 발행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렇게 되면 현재도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중 최악인 재정 상태는 파산 지경으로 치닫는다.

'대등한 미 · 일 관계'를 강조한 것이 반미로 인식되고 있는 것도 하토야마 내각이 풀어야 할 숙제다. 더구나 사민당과 연립정권에 합의하면서 오키나와 미군기지 철수와 미 · 일 지위협정 개정도 추진키로 했다. 미국은 '오키나와 미군기지 이전 등 이미 일본 정부와 합의한 사항은 정권이 바뀌었다고 재검토하지는 않겠다'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두 개의 태양'도 걸림돌

하늘에 태양은 하나여야 한다. 하지만 지금 민주당에는 태양이 두 개다. 하토야마 차기 총리 말고도 오자와 이치로 민주당 신임 간사장(사무총장에 해당)은 강력한 태양이다. 하토야마 대표는 첫 내각 인선을 하면서 일일이 오자와 간사장의 '결재'를 받았다. 이달 초 하토야마 대표는 후지이 히로히사 최고 고문을 재무상에 기용하기로 마음을 굳혔지만 오자와 간사장이 난색을 표명해 막판까지 내정을 못하고 질질 끌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오자와 간사장은 민주당 정권의 실질적 오너다. 8 · 30 총선 압승은 오자와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총선 공천을 주도한 오자와 간사장은 당내 계파 의원만 150명에 달한다. 하토야마 그룹(45명),간 나오토 그룹(60명),마에하라 그룹(60명)을 압도하는 최대 파벌이다. 정당에서 의원 수는 곧 힘이다. 민주당의 한 간부는 "앞으로 오자와 간사장의 영향력이 인사뿐 아니라 정책에서도 결정적으로 작용하면 하토야마 총리는 허수아비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도쿄=차병석 특파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