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료들의 고삐를 잡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가스미가세키(일본 관청가 이름으로 관료집단을 지칭)를 대청소해 묵은 고름을 모두 짜내겠다. " 자민당 정권에서 5000만건의 연금 기록이 사라진 사실을 파헤쳐 '미스터 연금'으로 불리는 나가쓰마 아키라 의원.민주당 내 정책통인 그는 31일 당선 일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이 얘기를 전해 들은 후생노동성의 한 간부는 "관료들이 공공의 적이 된 기분이다. 민주당 정권이 관료집단을 아예 해체하려는 것 아니냐"며 걱정했다.

8 · 30 총선에 따른 여야 정권 교체는 일본 국가시스템의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국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아 정권을 잡은 민주당은 지난 반세기 동안 자민당 정권이 구축한 정치 · 경제 · 외교 체제를 새로운 틀로 다시 짜겠다는 태세다. 특히 관료들이 모든 정책을 만들고,그것을 매개로 정치권 · 관료 · 기업이 서로 얽힌 정 · 관 · 경 유착의 '먹이사슬' 고리를 끊겠다고 공언했다. 일본 관가와 재계에는 '폭풍 전야'와 같은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


◆떨고 있는 관료들

자민당 정권에서 정책의 주도권은 사실상 관료들이 쥐고 있었다. 관료들은 추진하려는 모든 정책을 이해관계가 걸린 족(族)의원(특정 업계와 유착된 의원)들과 먼저 타협하고 조율했다. 이 조율이 끝나면 국회 상임위 심의 등은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관료들은 족의원이 보호하는 특정 업계에 적정한 이권을 나눠줬다. 그 대가로 족의원은 업계로부터 정치자금을,관료들은 낙하산 인사를 보장 받았다. 이렇게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정 · 관 · 경 유착 고리는 지난 50여년간 기득권으로 뿌리내렸다. 민주당은 이 기득권을 부수겠다는 것이다. 비효율과 부패의 온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한 첫 조치가 관료들을 핵심 정책 결정에서 배제하는 것이다. 그동안 실질적으로 모든 정책을 결정해온 관료 중심의 사무차관회의를 폐지하고,그 역할을 정치인 주도의 각료위원회가 맡도록 할 방침이다. 또 정부에 국회의원 약 100명을 대신(장관) 부대신 정무관 등으로 파견해 정책 수립을 주도하도록 할 예정이다. 총리 직속으로 '국가전략국'이란 새 조직을 두고,정부 예산 골격과 외교정책 방향 등을 짠다는 것도 관료들의 힘을 빼기 위한 것이다.

관료 개혁이 예고된 만큼 가스미가세키는 요즘 떨고 있다. 재무성 경제산업성 후생노동성 국토교통성 등 업계와 유착이 심했던 부처의 간부들은 진작부터 민주당 실세나 의원들에게 '눈도장'이라도 찍기 위해 의원 사무실 앞에 줄을 서 기다리는 진풍경도 연출했다.

◆게이단렌도 자세 낮춰

민주당으로의 정권 교체는 일본 재계에도 충격이다. 그동안 자민당에 정치헌금을 몰아줬던 재계 대표단체인 게이단렌은 초긴장 상태다. 1955년 자민당 창당 이후 게이단렌은 '자유시장경제 체제의 보험료'라는 명분으로 자민당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덕분에 각종 금융 · 세제 혜택 등 정책적 지원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야당인 민주당과는 거래할 일이 없었다. 더구나 게이단렌은 정책 방향에선 민주당과 줄곧 대립각을 세웠다. 소비세 인상이 대표적이다. 게이단렌은 경기부양 재원 마련을 위해 소비세를 올리는 게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민주당은 국민 부담을 줄이기 위해 향후 4년간 소비세 인상을 논의조차 않겠다고 공약했다. 민주당이 제조업에 대한 근로자 파견을 원칙적으로 금지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게이단렌은 반대해왔다.

게이단렌은 지난해 정당별 정책평가에서 민주당의 주요 정책에 대해 "선심성 복지정책의 재원을 어디에서 마련해야 할지 불분명하고 당리당략에만 치우쳐 있다"며 대놓고 비판했다. 또 최고 점수인 'A'에서 최저인 'E'까지 5단계로 구분된 분야별 정책 평가에서도 'A'는 단 한 개도 주지 않았다. 대부분 'C'와 'D'를 매겼다.

총선 직전 게이단렌이 선거 중립을 선언하고,민주당 오카다 가쓰야 간사장 등 핵심 의원들을 초대해 간담회를 갖는 등 민주당과 거리 좁히기에 나섰지만 '뒷북'이었다는 지적이다. 게이단렌 일각에선 "당분간은 몸을 낮춰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게이단렌의 미타라이 후지오 회장(캐논 회장)은 총선 결과에 대해 "국민이 변화를 강하게 요구한 결과"라고만 짧게 코멘트했다. 또 다른 재계단체인 경제동우회의 사쿠라이 마사미쓰 대표(리코 회장)는 "건전한 의회민주주의를 위해 자민당의 재생이 불가피하다"며 민주당 정권에 대한 '자민당의 견제'를 기대했다.

도쿄=차병석 특파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