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년이 넘는 미국 대법원의 역사에서 여성으로는 3번째, 히스패닉계 인물로는 최초의 대법관에 오른 소니아 소토마요르(54)는 가난한 푸에르토리코 이민자의 가정에서 태어나 아메리칸 드림을 이뤄낸 전형적인 인물이다.

아이비리그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법관으로 승진가도를 달려온 소토마요르에 대해 공화당 진영에서는 "입지전적인 성장과정과 판사로서 화려한 경력에는 찬사를 보내지만 판결 성향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며 꽤 많은 반대표를 던졌다.

전반적으로 중도 혹은 진보적 성향으로 분류되지만 일부 판결에서는 인종적인 편견을 드러냈다는 점 때문이다.

대표적 사례가 지난해 코네티컷의 뉴헤이븐 시당국이 소방대원 승진시험에서 소수인종 가운데 승진요건에 해당하는 점수를 딴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시험결과를 무효화한 조치에 대해 손을 들어준 판결이다.

공화당측은 인준 청문회에서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물고 늘어졌으며 당시 승진시험에서 역차별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백인 소방관들을 청문회의 증인으로 동원, 소토마요르를 곤혹스럽게 했다.

소토마요르는 2001년 UC버클리대학 강연에서는 "총명한 라틴계 여성이 백인 남성보다 더 나은 판결을 내릴 수 있다"고 발언해 인종적 편견에 사로잡힌 인물이라는 비판을 불러왔으나 청문회 때 "단어 선택이 부적절했다"고 유감을 표명했다.

소토마요르의 부모는 2차대전때 푸에르토리코에서 뉴욕으로 건너온 이민자로, 초등학교 3학년이 학력의 전부인 아버지는 영어를 구사할 줄 모르는 공장노동자로 힘들게 일하다 소토마요르가 9살때 세상을 떠났다.

간호사였던 어머니는 주 6일 부지런히 일하며 뉴욕 브롱크스의 저소득층 주택가에서 소토마요르와 그의 남동생을 키워냈다.

훌륭한 교육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한다는 사실을 굳게 믿은 소토마요르의 어머니는 빈곤가정이 밀집해 있던 동네에서 유일하게 백과사전 전집을 자녀들에게 사줬으며 소토마요르를 가톨릭계 사립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했다.

8살때 소아 당뇨 진단을 받았던 소토마요르는 꿈을 잃지 않고 학업에 정진, 친지와 교사의 도움으로 장학금을 받아 프린스턴대학에 진학해 최우등으로 졸업했으며 예일대 로스쿨에서는 학회지 편집장을 맡았다.

로스쿨 졸업후 뉴욕지방 검찰청과 로펌에 몸담았다가 조지 W.H. 부시 대통령에 의해 1991년 지방법원 판사로 지명됐다.

판사로 첫 임명될 때 상원에서는 무난히 인준을 받았지만 1997년 빌 클린턴 대통령에 의해 상급법원인 항소법원 판사로 지명됐을 때는 공화당 의원들의 반대로 1년 넘게 인준 절차가 지연되는 일도 있었다.

당시 공화당 의원들의 일부는 나중에 소토마요르가 히스패닉계로 대법관 후보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그의 항소법원 판사 인준을 미뤘다는 후문이다.

당시 민주당의 패트릭 레이히 의원은 히스패닉계 여성이라는 이유로 1년 넘게 인준절차를 미룬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면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제2순회 항소법원 판사로 재임중 소토마요르는 1994∼95년 미 프로야구(MLB) 선수노조의 파업으로 야구경기가 중단됐을 때 파업을 종식시키는 강제명령을 내린 것으로 유명하다.

소토마요르는 이 판결로 `야구를 살려낸 판사'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인준청문회 때는 뉴욕양키스팀의 투수로 활약하면서 퍼펙트게임을 달성한 바 있는 유명스타인 데이비드 콘이 증인으로 나서기도 했다.

소토마요르는 프린스턴대학 재학중이던 1976년 결혼했으나 83년 이혼했으며 97년 뉴욕의 건축업자와 약혼했으나 결혼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워싱턴연합뉴스) 박상현 특파원 shpark@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