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미국 로스엔젤레스.

한 남자가 밤거리의 한적한 주택가로 들어선다. 독거노인의 집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린다. 노파는 아무 의심 없이 문을 연다. 순간 남자는 돌변한다. 수십 분 정도가 지났을까. 노파는 침대 위에 늘어져 있다. 더는 숨을 쉬지 않는다. 얼굴 위에는 베개가 올려져있다. 옷은 찢겨져 있다. 남자는 다른 희생자를 찾아 LA의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비슷한 사건은 1989년까지 계속됐다. 동일범에 의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망자는 30명을 넘어섰다. 범인의 살해 방식은 같았다. 범행의 주요 대상은 혼자 사는 노파들이었다. 범인은 이들을 성폭행한 후 목을 졸라 질식시켰다. 숨이 끊어진 후에는 항상 베개나 이불을 얼굴 위에 덮었다.

모두가 살해당한 것은 아니었다. 살아남은 20여명은 로스엔젤레스 경찰청(LAPD)을 찾았다. 그들의 증언은 엇갈렸다. 범행 지역은 LA 곳곳으로 확산됐지만, 각 지역 경찰들은 서로에게 협력하지 않았다. DNA 추적기법은 도입되기 전이었다. 수사는 미궁에 빠졌다. 범인의 ‘완전 범죄’는 성공한 듯 보였다.


그리고 2009년.

미 경찰은 지난해 10월 자료 확보 차원에서 전과자들의 DNA 샘플을 일제히 채취했다. 반년 후, LA 경찰은 30일 두 건의 살인혐의로 기소된 존 토머스 주니어(72)를 조사하던 중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토머스의 DNA가 70~80년대 LA를 공포에 떨게 했던 두 차례의 연쇄살인 범죄 현장에서 나온 것과 일치한 것. 그는 강간죄로 두 번 유죄판결을 받은 전과자다.

로스엔젤레스타임즈(LAT)는 30일 “LA 경찰은 토머스가 다른 20여건의 살인사건의 용의자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관련 증거를 분석 중"이라고 보도했다. LAPD 강력반 리처드 벵스톤 형사는 ”모든 심문절차와 증거 분석이 끝나면 토머스는 LA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살해한 연쇄살인범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범인은 지난달 31일 남로스엔젤레스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검거됐다. 1972년 에텔 소콜로프(당시 68세)와 1976년 엘리자베스 맥큐언(당시 67세)를 살해한 혐의다. DNA 검사 등 추가 조사를 통해 LAPD는 토머스가 살해한 것으로 보이는 희생자가 최대 30명에 이를 것이라고 추정했다.

토머스는 1989년부터 노동자의 임금 조정을 담당하는 주(州)보험 중재자로 일해왔다. 범인은 “일을 시작하며 살인을 멈췄다”고 자백했다. 토머스를 고용한 주 보상보험기금의 제니퍼 바겐 대변인은 범인의 전과를 알았는지 여부에 대해 “그것은 개인적인 일”이라며 입을 다물었다.

범인의 회사 동료들은 그를 조용하지만 친근한 사람이었다고 증언했다. 동료들은 “범인은 주로 사무직을 맡아왔다”고 말했다.

◆'LA판 강호순' 토머스는 누구인가

토머스는 1937년 LA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범인이 12세가 되던 해 세상을 떠났다. 대모인 고모에 의해 길러진 토머스는 공립학교를 다녔다. 1956년에는 공군에 자원입대했다. 당시 범인의 상사였던 증인은 “종종 소집시간에 늦고 부주의했다”고 말했다. 그의 병적증명서에는 ‘불명예 제대’라는 주홍글씨가 남았다.

범인은 1957년 LA에서 강도 및 강간미수 혐의로 체포됐다. 6년 형을 언도받은 그는 가석방 기간에도 규정을 두 차례 어겨 1966년까지 감옥에 있었다.

첫 번째 연쇄살인은 수년 후 시작됐다. 범인은 헐리우드와 잉글우드 지역에 거주하는 백인 노파를 대상으로 범행을 저질러 ‘서부의 강간범’이라는 악명을 얻었다. 공안당국은 1970년 중반 특별 수사대를 구성했다.

수사대는 여러 용의자들을 심문했지만 토머스는 잡히지 않았다. 그는 수사 기간 동안 사회사업, 병원, 가전제품 영업 등 직업을 바꿔왔다.

‘서부의 강간범’은 시대를 관통하며 악명을 떨쳤다. 희생자들의 연령대는 50대에서 90대 사이였다. 영국 일간지 타임즈는 1975년 12월 ‘서부의 강간범’이 33명의 여성 노인을 성폭행했으며 이 중 10명을 죽였다”고 보도했다.

1978년, 토머스는 다시 감옥으로 향했다. 패서디나에서 강간죄로 검거된 범인은 1983년 풀려났다. 석방 후 치노로 거주지를 옮긴 범인은 인랜드 밸리 지역에서 다시 여성 노인들을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연쇄살인은 1989년까지 계속됐다. 그로부터 20년, LA의 악명 높은 연쇄살인범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갔다.

2001년 겨울, LAPD는 강력범죄 및 연쇄살인 특수 수사반을 창설했다. 1960년부터 누적된 약 9000건의 미결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의 수사에는 미 전역의 DNA 데이터가 제공됐다. 결과는? ‘냉혹한 수면제’(Grim Sleeper)에게는 생애 세 번째로 손목에 수갑이 채워졌다.

한경닷컴 이진석 기자 gen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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