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엔 패션 명품업계도 피해갈 수 없었다. 지난 1월 미국의 고급 의류 판매는 전년 동기 대비 27.6% 줄었다. 마스터카드 산하 스펜딩펄스에 따르면 작년 11월과 12월 명품 판매는 크리스마스 시즌임에도 불구하고 전년 같은 기간보다 34% 줄었다.

패션업계의 이 같은 분위기는 매해 3월 초 뉴욕 런던 밀라노 파리에서 개최되는 추 · 동계(가을 · 겨울) 신상품 패션쇼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밀라노의 경우 행사장 수가 작년 99곳에서 올해 79곳으로 줄었다. 바이어 수도 급감,카발리나 돌체앤가바나의 경우에도 가장 앞줄 곳곳에 빈자리가 생길 정도였다. 심지어 장프랑코 페레는 패션쇼 개막 이틀 전 파산보호신청을 해 맨 앞줄에 법정관리인을 앉히고 신상품 발표를 했다.

뉴욕은 웬만한 디자이너들은 다 허리띠를 졸라매는 모습이다. 마크 제이콥스의 경우 패션쇼 초대 손님을 작년의 2000명에서 900명으로 줄이기까지 했다. 드레스로 유명한 베라 왕도 행사장을 따로 만들지 않고 기존 매장에서 조촐하게 패션쇼를 열었다. 신규 브랜드인 앨리스 템퍼레이는 한발 더 나아가 비용을 아끼기 위해 패션쇼를 없애고 인터넷에 멀티미디어 패션 전시 동영상을 올리는 것으로 대신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올봄 4대 패션쇼가 "두 경향으로 완전히 갈렸다"고 설명했다. 고객들이 부담없이 입을 수 있도록 실용적인 옷을 출시하거나 아니면 아예 판매를 포기하는 대신 브랜드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극단적으로 화려한 옷을 내놓는다는 것이다.

미국과 파리는 '실용'을 선택했다. 캘빈 클라인,도나 카란,랄프 로렌 모두 유행을 타지 않는 단순하면서도 차분한 디자인의 제품을 내놓았다. 랑방과 디올은 아예 30세 이상의 여성을 겨냥해 노출이 적은 드레스를 내놓았을 정도다.

반면 런던과 밀라노의 상당수 브랜드는 화려함을 강조했다. 런던의 유명 디자이너 자일스 디컨의 경우 딱딱한 가죽 스커트나 커다란 모피 장식을 주렁주렁 단 옷을 내놨다. 이는 패션쇼에 출시한 의상이 아닌 같은 브랜드를 쓰는 화장품과 장신구를 팔기 위해서라고 가디언은 분석했다.

패션잡지 보그 영국판 2월호는 표지모델로 정상급 모델이나 배우,화제의 인물을 쓴다는 관례를 깨고 여성 그룹 '걸 얼라우드' 소속 가수인 셰릴 콜을 등장시켰다. 럭셔리 잡지인 보그의 이미지를 무너뜨릴 수 있는 모험을 시도한 이유는 경기침체다. 1월호 광고 매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20% 이상 줄었고 발행면수도 60페이지 이상 감소해 어떻게든 판매부수를 늘릴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귀동 기자 claymor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