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경제 구조를 지탱해온 '팍스 달러리움(pax dollarium · 달러가 주도하는 세계경제 질서)' 사수에 나설 태세다. 러시아에 이어 중국이 달러를 대체할 새로운 기축통화를 제안하고 나서자 티모시 가이트너 재무장관,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폴 볼커 백악관 경제회복자문위원회(ERAB) 위원장은 물론 버락 오바마 대통령까지 나서 "새 기축통화는 필요 없다"고 반박했다.

◆"달러 강세는 미국에 대한 신뢰 증거"


오바마 대통령은 24일 TV 기자회견에서 "달러가 지금 아주 튼튼한 것은 세계에서 가장 큰 경제대국이자 가장 안정된 정치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미국에 대한 전 세계 투자자들의 신뢰가 있기 때문"이라며 "새로운 기축통화는 필요없다"고 잘라 말했다. 가이트너 장관도 이날 의회 청문회에서 마이클 바쿠만 공화당 의원이 "중국이 달러화를 대체할 기축통화를 제안한 데 대해 반박하겠느냐"고 묻자 "그렇다"고 답했다. 똑같은 질문에 대해 버냉키 FRB 의장도 "나 역시 그렇다"고 말했다. 달러화의 지위를 부인하는 어떤 행동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볼커 ERAB 위원장도 이날 월스트리트저널 컨퍼런스에서 "중국은 표리부동하다"며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달러(국채)를 사들여 온 중국이 이제와서 딴소리를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경기부양 자금 마련을 위해 국채 발행을 늘려야 하는 미국 정부로서는 최대 투자자인 중국이 세계 통화 질서에 문제를 제기하고 나서자 크게 당황하는 모습이다. 저우샤오촨 중국 인민은행장은 전날 "국제통화기금(IMF)이 1969년 만든 특별인출권(SDR) 사용을 확대함으로써 미 달러화를 대체할 글로벌 기축통화로 삼자"고 제안했다.

◆브릭스 4개국 연합 가능성


저우 행장의 달러 공격은 위안화를 기축통화의 반열에 올리기 위한 통화전쟁이 본격화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저우 행장이 "달러 유로 엔화 파운드로만 구성돼 있는 SDR에 국가별 경제규모를 반영해 주요 경제국 통화들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언급한 것은 세계 3위 경제대국인 중국의 위상을 새로운 세계 공용의 슈퍼 통화에 반영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중국이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에 대해 끊임없이 위협적인 발언을 해왔지만 이번처럼 직격탄을 날리지는 않았었다. 지난해 11월 워싱턴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에서 후진타오 주석은 "국제통화가 다원화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중국만이 달러화를 공격하고 있는 건 아니다. 일주일 전 러시아는 크렘린궁 성명을 통해 "IMF가 새 기축통화를 발행해 달러를 대체해야 하며 이것이 G20 2차 정상회의의 핵심 의제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외환보유액 세계 1위와 3위인 중국과 러시아의 연이은 달러 공격은 G20 정상회의에 대한 신흥국 입장 정리를 위해 이달 초 중국 러시아 인도 브라질 등 브릭스 4개국 관계자가 회동한 직후 이뤄졌다. 로이터통신은 이 회동에서 중국이 이미 기축통화를 달러에서 SDR로 대체하는 방안을 회람시켰다고 보도했다. 브릭스를 중심으로 달러를 공격할 연합군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물론 중국과 러시아도 달러를 기축통화에서 끌어내리는 게 단시간 내 이뤄지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홍콩달러,위안화와 연계 검토

홍콩의 행정수반인 도널드 창 행정장관은 이날 홍콩에서 열린 크레디트스위스 그룹 주최 투자포럼에 참석,"홍콩달러를 위안화와 연계하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월스트리트저널은 1983년 이후 달러당 7.80홍콩달러를 기준으로 일정 범위 내에서만 환율변동을 허용해온 홍콩 당국자의 발언으로는 이례적이라고 보도했다. 창 장관의 언급은 "달러 페그제는 홍콩 통화정책의 주춧돌"이라는 말을 되풀이해 온 홍콩 관료들의 그동안의 입장과는 크게 다른 것이다. 물론 전제를 달았다. "매우,매우,매우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위안화가 (자본거래에서도 자유롭게 환전이 이뤄지는) 완전 자유태환이 이뤄질 때"라는 조건을 제시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창 장관이 달러 페그제 포기를 처음 시사하는 발언을 한 시점에 주목한다. 저우 행장이 폭탄 제안을 한 하루 뒤에 나왔다는 점에서 그렇다. 달러를 기축통화에서 밀어내기 위한 중국 정부의 전략에 호응하겠다는 메시지로 읽히는 대목이다.

뉴욕=이익원 특파원/오광진 기자 ik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