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도 예년에 비해 봄이 일찍 찾아왔다. 하지만 기업들 사이엔 아직도 찬바람이 쌩쌩 분다. NEC 2만명,소니 1만6000명,파나소닉 1만5000명,도요타자동차 6000명 등 해고 행진은 현재 진행형이다. 오는 6월 주주총회를 앞두고 주요 기업의 사장 교체도 줄을 잇고 있다. 도요타 등 대부분 기업은 올해 임금협상에서 기본급 동결은 물론이고 정기 호봉승급을 미루고,상여금을 깎는 등 사실상 임금을 삭감했다. 업계 전반에 냉혹한 구조조정이 한창이다.

도요타 4500억엔(약 6조7500억원),파나소닉 3800억엔(5조7000억원),도시바 2800억엔(4조2000억원) 등 수천억엔 적자가 예상되는 마당이니 당연한 얘기인지 모른다. 세계 동시불황에 따른 수요감소에 엔고까지 겹쳐 이중고를 겪는 일본 기업 입장에선 구조조정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긴 하다. 하지만 일본 기업들의 재무제표를 조금만 유심히 살펴보면 '이렇게까지 가혹하게 구조조정을 할 필요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다.

일본 기업들이 쌓아놓고 있는 내부유보금을 보면 그렇다. 도요타는 작년 말 현재 총자산 29조6000억엔 중 내부유보금이 12조3000억엔(185조원)에 달한다. 삼성전자 총자산(93조4000억원)의 두 배에 달하는 돈을 갖고 있는 셈이다. 2002년 이후 경기회복기에 매년 조 단위의 사상 최대 이익을 올려 비축한 자금이다.

도요타뿐이 아니다. 2007년 현재 자본금 10억엔 이상 일본 기업 430개사의 내부유보금은 229조엔.2002년(167조엔)에 비해 1.4배로 늘었다. 수천억엔의 적자를 몇 년간 지속해도 끄떡없을 정도의 거액이다. 일본 공산당이 '대기업들이 내부유보금 1%씩만 써도 비정규직 40만명의 고용을 유지할 수 있다'며 감원에 나선 기업들을 맹비난하고 있는 배경이다.

그렇다면 일본 기업은 왜 이렇게 살벌한 구조조정에 나선 걸까. 여러 해석이 있지만 설득력있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미국의 지원 요청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한 포석이다. 경영컨설턴트인 오마에 겐이치 박사는 작년 말 인터뷰 때 "미국의 제너럴모터스(GM) 등 '빅3' 자동차회사가 파산 위기에 몰리면 미국 정부가 도요타에 인수 요청을 할 수 있다"며 "그때 도요타가 어떤 자세를 취할지 지금부터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같은 맥락에서 도요타 등 일본 기업이 선수를 치기 위해 '엄살'을 부린다는 분석이다.

둘째 이번 기회에 지난 10년간 붙었던 군살을 제거한다는 의도다. 일본의 자동차 · 전자업계는 1990년대 초 거품경제 붕괴 후 회복과정에서 엔저 호황을 거치며 생산시설 · 인력구조에 과잉이 유발됐다. 세계 수요가 20~30% 줄어든 상황에서 과잉 부문은 말그대로 '거품'이다. 적자를 빌미로 이 거품을 확 걷어내자는 게 일본 기업들의 전략이다. 불황 때 뱃살을 빼고 재도약의 기회를 기다린다는 얘기다. 기회는 태양전지 등 미래 성장산업에서 찾고 있다. 구조조정을 몰아쳐 근로자들의 임금인상과 주주들의 배당확대 요구를 잠재운 건 덤으로 얻는 효과다.

한국 기업들은 지금 어떤가. 혹시 원저(低) 효과에 취해 구조조정을 등한히 하는 건 아닌가. 일본은 전략적으로 허리띠를 졸라매는데 우리만 한가히 봄날을 맞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