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시단 활동 시작 후 가스 공급 재개하기로

사태 해결 최대 고비..발칸국가 등 최악 상황


유럽 국가에 전례 없는 가스 대란을 일으킨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가스 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유럽연합(EU) 감시단 파견과 관련, 세부사항에 합의하고 러시아 국영 가스회사 가즈프롬이 감시단 활동 시작과 동시에 가스 공급을 재개키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 가스 공급 재개 임박 = 알렉세이 밀러 가즈프롬 회장은 9일 "EU 감시단이 우크라이나 가스관에 대한 감시를 시작한 직후 유럽행(行) 가스 공급을 재개할 수 있다"고 밝혔다고 인테르팍스 통신이 전했다.

러시아 전문가를 포함해 이번 감시활동에 참가하는 18명 중 선발대 5명이 이날 오후(현지시각)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 도착했다고 AFP 통신이 EU 집행위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이들은 가스 수송 루트를 차례로 돌며 러시아 측의 말대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산 가스를 유용했는지 여부를 집중적으로 점검하고 가스 공급 중단의 주체가 우크라이나인지, 러시아인지를 확인할 예정이다.

앞서 EU 순회 의장국인 체코 정부는 8일 의장국 성명을 통해 "미렉 토폴라넥 총리가 감시단 구성과 관련해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와 통화했으며 두 총리가 가스 공급에 연관된 모든 지역에 감시단을 파견하는 '조건'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감시단이 감시 활동을 시작하고 러시아가 공급 밸브를 연다고 해도 가스관 시설 점검과 유럽 국가까지 도달하는 시간을 고려하면 완전 정상화까지는 최소 3일 소요될 것으로 전망된다.

토폴라넥 체코 총리는 이날 직접 우크라이나를 방문, 감시단이 가스 운송과 관련된 장소에 즉각 배치되는지를 확인할 것이라고 현지 소식통들이 전했다.

그러나 가즈프롬은 성명에서 "우크라이나가 가즈프롬과 러시아 에너지부 관계자가 포함된 감시단 구성을 거부했다"면서 "이는 현 위기 상황을 악화시키려는 의도"라고 비난했다.

이런 내용은 나프토가즈가 러시아 감시단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다고 한 것과 완전히 배치된다.

◇ 유럽 가스 대란 악화일로 = 분쟁 당사자들이 사태 해결을 모색 중인 사이 유럽 국가들의 가스 대란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특히 러시아산 가스에 전적으로 의존하면서 이번 분쟁의 최대 피해지역으로 떠오른 불가리아, 세르비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등 발칸 국가들에서는 수십만 명이 이상 한파 속에 난방 없이 밤을 지새우고 있다.

세르비아에서는 8일 밤과 9일 새벽 최소한 8개 도시에서 10만 명이 추위에 떨며 밤을 지새웠다고 AP 통신 등이 보도했다.

세르비아는 전날부터 헝가리와 독일로부터 비축분의 가스를 긴급 수입하고 있지만 필요한 양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보스니아에서도 7만 2천 명이 영하 15도까지 떨어진 강추위 속에서 난방 없는 밤을 보냈다.

보스니아 정부는 현재 비축 가스로는 일주일도 버티지 못할 것이라며 조속한 공급 재개를 호소했다.

불가리아에서는 72개 대형 공장이 아예 문을 닫았고 153개 기업은 기계 동파 방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가스만을 공급받고 있다.

100개 가까운 초등학교와 유치원이 임시 휴교 중이며, 수도인 소피아에선 전차와 버스의 난방이 전면 중단됐다.

성난 소피아 시민은 전날 우크라이나 대사관 앞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가스 테러리스트'라고 비난하며 항의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금융위기와 경기침체로 가뜩이나 위축된 동유럽 각국 산업계의 피해도 커지고 있다.

비축분이 열흘밖에 남지 않은 슬로바키아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한 가운데 정부가 1천 개 기업에 가스 사용 중단을 요청했고 기아자동차와 푸조 등 대단위 자동차 제조업체의 생산라인도 멈춰 섰다.

로베르트 피초 총리는 공급이 즉각 재개되지 않으면 가스 발전에 의존하는 일부 지역은 정전 사태를 맞을 수 있다며, 지난해 말 EU와의 합의로 사용을 중단한 야슬로프스케 보후니체 원자력 발전소의 재가동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또 불가리아 경제부는 조업을 중단한 152개 기업의 생산 손실 규모가 430만 유로에 달한다고 밝혔다.

헝가리는 아직 비축한 가스양은 어느 정도 여유가 있지만, 스즈키, 한국타이어, 브리지스톤 등 대형 사업장의 가스 공급을 하루 동안 중단하며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

이번 사태에서 한발 비켜서 있던 영국 등 서유럽 국가들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 LNG(액화천연가스) 수입량을 대폭 늘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가 하면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는 "우크라이나가 EU 국가들로부터 차관을 도입, 가스 채무를 갚을 수도 있을 것"이라면서 "가까운 시일 내 다른 국가들과 이 방안에 대해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EU는 9일 27개 회원국 소관 부처 당국자들과 에너지업계 관계자들이 참석하는 회의를 열고 오는 12일에는 긴급 에너지 장관 회의를 통해 회원국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비상대책을 마련할 예정이다.

◇ 아직 안심 못해 = 감시단 활동 시작으로 러시아가 가스 공급을 재개한다고 하더라도 이번 가스 분쟁이 말끔히 해소된 것은 아니다.

아직 우크라이나가 가스 채무를 완전히 다 갚지 못했고 올해분 가스 가격을 두고 여전히 견해차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밀러 회장은 "우크라이나 측과 협상에 별 진전이 없었다"면서 "아직 우크라이나는 새로운 계약에 서명할 의사가 없는 듯 보인다"고 말했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도 이날 밀러 회장으로부터 상황 보고를 받고 "불행히도 아직 우크라이나를 신뢰하지 못하고 있다.

"라면서 "필요한 모든 서류에 서명이 이뤄지고 나서 우크라이나와 협력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푸틴 총리는 전날 외신 기자들에게 "우크라이나가 시장 가격에 러시아산 가스를 산다면 러시아도 가스 통과료를 시장 가격에 맞춰 줄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는 올해분 가스 가격을 유럽 평균 공급가인 418달러(1천㎥)를 제시하고 있지만, 우크라이나는 201~230달러를 요구하고 있고 러시아가 250달러 이상을 원한다면 러시아 또한 자국에 내는 가스 통과료를 인상해 줘야 한다는 입장이다.

러시아는 지난해까지 가스 통과료로 1.6달러(100km 기준)를 내고 있고 이 금액은 2010년 말까지 계약된 상태다.

현재 가스 통과료의 시장 가격은 3.4달러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푸틴 총리는 또 "가스 수송은 시장원리와 국제법 규범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면서 "문제가 있다면 국가 간 상업분쟁을 다루는 스톡홀름 상사 중재법원에 제소하는 것이 가장 세련된 방법일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러시아는 지난 1일 채무 불이행 등을 이유로 우크라이나 국내 시장에 공급되는 가스를 모두 중단한 데 이어 지난 5일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산 가스를 훔치고 있다면서 우크라이나를 거쳐 유럽으로 가는 가스 공급을 전면 중단했다.

(부다페스트.브뤼셀.모스크바연합뉴스) 권혁창.김영묵.남현호 특파원 hyunho@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