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요리 배울땐 독어로 수업 … 졸업때까지 5개 언어 구사
재학중 5-7개 해외자매학교 방문
모든비용은 학교서 부담
천재와학습부진이 공존할 수 있게
원어민 보조교사 등 수업바다 교사 3명 투입

영국 런던에서 기차를 타고 남쪽으로 달린 지 한 시간.런던의 고층 빌딩과는 대조적으로 아기자기한 주택들이 나타난다. 브라이튼 시.영국 남부 지역의 최대 언어 특성화 중·고등학교인 '호브 파크 스쿨(Hove Park School)'이 있는 곳이다. 이 학교는 영국 정부의 지원을 받는 '공립 언어 특성화 학교(Language Specialist College)'다. 한국으로 치면 공립 국제중.고교에 해당한다.

이 학교는 영국 공교육 개혁의 성공신화로 손꼽힌다. 학생들의 가정형편은 천차만별이다. 천재끼를 가진 학생이 있는가 하면 학습부진아도 다닌다. 그런데도 이들은 학교 교육에 놀랍도록 집중한다. 그만큼 흥미가 있어서다. 성과도 눈부시다. 이 학교를 졸업하면 최대 5개국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재학 중 최소 5~7개의 해외 자매학교도 방문한다. 공립학교에서도 얼마든지 창조적인 글로벌 인재를 길러낼 수 있다는 생생한 사례다.

지난 21일 오전 9시 호브 파크 스쿨.1교시 '푸드 테크놀로지(가정)' 수업이 시작됐다. 맛있는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힌다. 20명의 학생들은 영국 전통 음식인 로스트 비프와 치킨 요리를 하고 있다. 이들을 지켜보는 사람은 담당 교사인 제니퍼 앨튼씨뿐이 아니다. 지구 반대편의 한국 군포시에 위치한 궁내중 2학년 학생들 역시 원거리 화상을 통해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궁내중은 호브 파크 스쿨의 유일한 한국 파트너다.



한국 시간으론 오후 5시.영국 학생들의 모습을 신기하게 지켜보던 궁내중 국제교류반 학생 21명도 한국의 전통 요리 준비에 들어갔다. 최순주 국제교류반 담당 교사는 "구절판 화전 경단 등 세 가지 요리를 준비했다"며 영어와 한국말로 번갈아 설명했다. 지난 19일부터 일주일간 궁내중을 방문 중인 호브 파크 스쿨의 로스 골딩 교사는 화상으로 보이는 영국 제자들에게 "한국에는 불고기 잡채 김치 등 건강에도 좋고 맛있는 음식들이 많다"고 최 교사의 설명을 거들었다. 영국과 한국의 전통 음식에 대해 공부하는 푸드 테크놀로지 수업은 한 시간 남짓 계속됐다.

푸드 테크놀로지 과목은 학교가 도입한 '내용 중심의 언어 학습(CLILㆍContent and Language Integrated Learning) 방식'의 대표적인 수업이다. 이는 특정 과목을 해당 외국어로 가르치는 방식을 말한다. 일종의 몰입교육인 셈이다. 프랑스 학생들과 전통 음식을 배우는 수업을 한다면 그 수업은 프랑스어로 진행된다. 독일 음식은 독일어,이탈리아 음식은 이탈리아어,중국 음식은 중국어로 배우게 된다.

골딩 교사는 "요리 수업은 다른 과목에 비해 흥미롭고 재미있기 때문에 외국어 수업을 해도 학생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다"며 "일본 독일 프랑스 등 6개국의 학교들과 함께 푸드 테크놀로지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라고 말했다.

호브 파크 스쿨 학생들이 쉽게 외국어를 배우는 비결은 바로 이 같은 프로젝트 수업 덕분이다. 차민 하틀리 국제교류 담당 교사는 "종교 드라마 환경오염 등 다양한 주제를 선정해 2~3년 동안 자매 결연 학교들과 프로젝트 수업을 진행한다"며 "정기적으로 원격 화상 수업을 하고 일주일 정도 직접 방문하기도 한다"고 소개했다. 한 프로젝트당 참여 인원은 16~40명 정도.학생들은 자신이 원하는 프로젝트를 고를 수 있다. 현재 전체 1800명의 학생 중 80%가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학생들의 해외 자매학교 방문 비용은 학교 측이 전액 부담한다.

학생들은 재학 기간 중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중동어 일본어 중국어 등 총 10개국 언어를 접할 수 있다. 입학 후 14세가 되면 이 중 2개 언어를 반드시 선택해야 한다. 선택한 언어를 2년간 배운 뒤 16세가 되면 또다시 2개 언어를 추가로 선택할 수 있다. 18세 졸업 때는 최대 5개 언어를 구사하게 된다. 하틀리 교사는 "모든 언어 수업은 해당 언어로 진행되고 과목별로 원어민 보조교사가 배치된다"고 설명했다. 또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는 학습 부진아를 위해 학습 보조교사도 별도로 배치된다. 담당 교사와 원어민 보조교사,학습 보조교사 3명이 수업을 함께 진행한다.

이런 프로그램을 진행하려면 많은 돈이 들 수밖에 없다. 호브 파크 스쿨은 언어 특성화 학교로 지정된 덕분에 전액 정부에서 예산을 지원받는다. 그러다보니 질 높은 교사를 확보할 수 있고 다양한 프로그램도 운영할 수 있다. 그렇지만 교육은 돈만으로 해결되는 게 아니다. 교사들의 열정과 학생들을 끌어들이는 프로그램 개발 등이 필수적이다. 이런 점에서 이 학교의 성공을 결코 평가절하할 수는 없다. 크리슨 교장은 "브라이튼 지역은 지역적 특성상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습 부진아도 많아 공부 잘하는 학생에게만 집중할 수 없다"며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가정형편이 좋든 나쁘든 관계없이 모든 학생들이 흥미를 갖고 참여할 수 있도록 교육한다"고 강조했다.



학교의 궁극적 교육 목표는 글로벌 시민의 양성이다. 전 세계가 하나로 엮이는 글로벌 시대에 다른 문화를 수용할 줄 알고 언어 실력으로 무장한 인재를 길러내는 게 시급하다. 하틀리 교사는 "어린 나이에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면 이질적인 문화를 수용하는 능력이 생긴다"며 "그러다보면 글로벌적인 시각을 갖추게 되고 자연스럽게 창조적인 아이디어도 발산된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서는 공교육도 얼마든지 진정한 글로벌 인재를 길러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듬뿍 묻어 나왔다.

브라이튼(영국)=성선화 기자 d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