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전후질서 규정의 첫 단추인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의 정당성에 대해 본격적인 문제제기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일본 야스쿠니(靖國)신사는 "A급 전범은 일본 국내에서는 범죄자가 아니다"라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힌 데 이어 25일 경내에 도쿄재판 당시 모든 피고에 대해 무죄를 주장한 인도인 펄 판사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을 세우고 제막식을 가졌다. 인도대사관 관계자들도 참석한 제막식에서 야스쿠니신사측은 "일본 무죄론을 전개한 아시아의 학자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고 밝혔다. 산케이(産經)신문에 따르면 비문 제막식에는 일본주재 인도대사관 무관을 포함한 관계자 40여명이 참석했다. 제막식이 끝난 후 비문건립을 지원한 비영리법인(NPO) `이상을 생각하는 모임'대표는 "펄 판사를 기리는 비석이 야스쿠니신사에 설치된 것은 큰 의의가 있다"면서 "역사에 대한 자학적 풍조의 뿌리는 도쿄재판에 있는 만큼 문제를 바로 잡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높이 2.1m, 폭 1.8m인 이 비석에는 펄 판사의 상반신을 찍은 흉판과 당시 그가 주장한 소수의견의 의의 등이 새겨졌다. 펄 판사는 도쿄재판에 참여한 11명의 판사 중 한 명으로 미군의 원폭투하 등을 언급한 후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총리 등 A급 전범을 포함한 피고 전원의 무죄를 주장했다. 야스쿠니신사는 이에 앞서 도쿄(東京)신문의 취재에 대해 문서로 보내온 답신에서 A급 전범은 "일본 국내법으로는 범죄자가 아니다"라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야스쿠니측은 A급 전범의 전쟁책임에 대해 1953년 제정된 개정 유족원호법 등을 근거로 들며 "수형자는 국내에서는 범죄자로 간주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도쿄재판에 대해서도 "재판이 절대 옳았다고는 단언할 수 없다"며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야스쿠니신사의 이런 입장은 A급전 범의 전쟁책임을 부인한 것으로 야스쿠니참배가 "전쟁을 미화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의 설명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일본은 A급전 범의 전쟁책임을 인정한 극동국제군사재판을 받아들이는 것을 전제로 1951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통해 독립국의 지위를 회복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A급 전범이 합사돼 있는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는 것은 "침략역사를 정당화하는 것"이라는 한국, 중국 등의 비판에 대해 "참배가 전쟁을 미화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강변해 왔다. 다만 A급전 범의 전쟁책임에 대해서는 "도쿄재판에서 전쟁범죄인으로 규정됐으며 그 점은 일본도 받아들인다"는 입장을 밝혔다. 야스쿠니신사의 입장은 고이즈미 총리의 이런 설명과도 크게 다른 것이다. 야스쿠니신사는 또 A급 전범 분사문제에 대해 "설사 유족 전원이 분사에 찬성하더라도 신사측이 분사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밝혀 분사 가능성을 전면 부인했다. 야스쿠니신사의 이런 입장은 "A급 전범은 일본 국내에서는 더이상 죄인이 아니다"라고 주장한 모리오카 마사히로(森岡正宏) 후생노동성 정무관의 발언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도쿄신문은 야스쿠니측의 이런 입장으로 보아 고이즈미 총리가 아무리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과 전몰자 추도를 위해" 참배한다고 주장해도 참배 자체가 전쟁책임을 애매하게 하는 측면이 있다고 지적하고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올해 참배를 하지 않는다고 해도 야스쿠니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도쿄=연합뉴스) 이해영 특파원 lhy@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