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를 좋아하는 아일랜드 사람들에게 '2002 한ㆍ일월드컵'은 단연 화제였다. 서울시청 앞을 물들인 붉은 악마의 물결이 연일 전파를 타고 아일랜드 시청자들에게 다가갔다. 아일랜드 언론들은 당시 한국사람들의 열광적인 응원과 함께 수십만의 인파가 순식간에 모였다가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는 교통시스템에 주목했다. 현지 교민 박윤영씨는 "대중교통이 주요 이슈로 떠오른 탓에 아일랜드 언론들은 거미줄처럼 깔린 한국의 지하철을 특집으로 다루기도 했다"고 전했다. 아일랜드에는 아직 지하철이 없다. 생활수준이 높아지면서 승용차 보급이 크게 늘어났으나 도로망이 뒷받침되지 않아 출퇴근 시간대 더블린 시내는 교통 체증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오래된 건물이 대부분이어서 주차난도 심각하다. 지난 10년간 아일랜드의 관심은 오로지 외국기업 유치에만 쏠려 있었다. 대규모 사회간접자본(SOC) 건설을 통해 경제 재건을 도모하는 일반적인 성장 패턴과 달리 다국적 기업을 끌여들어 일자리를 만드는데만 치중했기 때문에 도로나 철도 등 인프라는 선진국 수준에 크게 뒤떨어진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의 2003년 국가경쟁보고서에 따르면 아일랜드의 철도 도로 항공 등 교통 인프라 수준은 10만점에 4.74점으로 비교 대상국 29개국 가운데 꼴찌다. 세계적인 IT회사들을 대거 유치해 뒀지만 정작 인터넷 접속 안정도는 5.93점으로 최하위 수준이다. 아일랜드 사람들 사이에는 '무늬만 선진국'이 아니냐는 자조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아일랜드 정부는 급기야 2000∼2006년 국가개발계획(NDP)을 세우고 사회간접시설 마련에 2백23억6천유로를 투입키로 했다. 외국자본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 외부 경기 변화에 지나치게 민감하다는 것도 아일랜드의 경제가 안고 있는 취약점중 하나. 문제는 지난 2001년에 그대로 드러났다. 9ㆍ11테러 직후 미국의 IT경기가 급속도로 침체하면서 아일랜드 경제는 직격탄을 맞았다. 2000년 사상 최고를 기록했던 경제성장률(11.5%)이 이듬해엔 6.0%로 곤두박질쳤다. 지난해에는 3.6%로 더 낮아졌다. 총리실 경제사회정책과 행정담당관 앤드루 먼로씨는 "아일랜드 경제의 대외의존도를 낮춰야 한다는 주장이 강력히 제기됐고 이를 위해 소프트웨어 산업을 중심으로 토종기업 육성 정책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헝가리 체코 등 동유럽의 EU(유럽연합) 가입도 아일랜드에는 새로운 도전이다. 지금까지 아일랜드는 다른 서유럽 국가들에 비해 값싼 양질의 노동력이 풍부하다는 점을 내세워 외국기업을 끌어들였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임금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는데다 동유럽이 EU시장으로 편입되면서 점차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다. 더군다나 동유럽 국가들도 아일랜드를 벤치마킹,법인세를 낮출 전망이어서 '외국기업 천국'의 입지도 흔들리고 있다. IDA 관계자는 "동유럽 국가들은 15년전의 아일랜드 수준인데다가 사회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경제 시스템 개혁 속도가 느리다"고 애써 자위했지만 밖에서 보는 시선은 그렇지 못하다. 올해 OECD 보고서는 "다국적기업들이 단순 생산기지 확보보다는 내수 시장을 겨냥해 투자를 하기 때문에 인구가 적은 섬나라 아일랜드보다는 인구가 많고 내륙에 위치해 유럽시장 접근이 용이한 동유럽이 투자처로 주목받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고속성장의 후유증으로 찾아든 인플레이션도 아일랜드 경제를 압박하고 있다. 90년대 2%대를 유지하던 소비자 물가지수가 2000년 5.3%로 뛰었고 2001년과 2002년에도 4%대를 이어갔다. 90년대 평균 0.6%정도 밖에 되지 않던 임금상승률도 2001년 4.6%, 2001년 3.3%를 기록했다. 집값도 폭등해 더블린의 사무실 임대 가격은 1㎡당 6백41유로로 경쟁도시인 암스테르담과 브뤼셀의 두 배나 된다. 아일랜드 경제는 현재 큰 전환점에 놓여 있다. 지난 87년 이후 '켈틱 타이거'의 신화를 낳은 성장 동력들이 동유럽의 부상으로 경쟁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고 고속성장의 후유증도 여기저기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일랜드 정부는 산업구조의 고도화를 대안으로 내놓았다. IDA아일랜드를 통해 바이오 제약산업 R&D센터 등 고부가가치 산업을 적극 유치한다는 것. 기업통상고용부 장관을 겸하고 있는 메리 하니 부총리는 지난달 "아일랜드는 지금 근원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며 자문단체인 '기업전략그룹'에 대해 6개월 내에 향후 10년동안 아일랜드가 성장을 유지할 수 있는 구체적인 청사진을 제시하라고 주문했다. 위기감을 반영한 듯 올해 초 경신된 새 사회연대협약에는 '지속가능한 진보(Sustaining Progress)'라는 타이틀을 붙였다. 3년간의 임금 인상 수준을 명시해온 그동안의 협약과 달리 이번에는 향후 18개월동안의 임금 인상 가이드 라인만 제시했다. 내년 5월 동유럽의 EU 가입이 아일랜드 경제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 다시 임금을 논의키로 한 것. 협약은 또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해 정부가 시장이 수용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적절한 가격 통제 등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했다. 성장이 둔화됐음에도 불구하고 아일랜드 경제에 대한 장기적인 전망은 밝은 편이다. 아일랜드경제인연합회(IBEC) 데이비드 크로건 수석이코노미스트는 "다른 나라에서 30∼40년에 걸쳐 이룩한 경제 성장을 단 10년 만에 이뤄낸 탓에 아일랜드는 현재 심각한 병목현상(bottleneck)을 겪고 있다"며 "그러나 이는 조정기의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 2∼3년 내에 곧 회복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더블린=김미리 기자 mi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