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 민중의 격화일로 반전, 반미 시위와반정부 구호에 자극받은 아랍 지도자들이 뒤늦게 종전(終戰) 외교노력을 시도한다고부산을 떨고 있다. 유엔 주재 22개 아랍국 대표들이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결의문 채택을 추진키로 한데 이어 이슬람회의기구(OIC) 57개 회원국들도 이라크전 조기 종전안을 유엔총회에 상정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OIC는 즉각적 휴전과 외국 군대의 이라크 철수, 이라크와 그 이웃 나라들의 주권과 정치적 독립을 존중하라고 촉구했다. 유엔총회 결의는 법적 구속력이 없지만그동안 정치적 제휴관계에 따라 분열상을 드러내온 아랍.이슬람권이 모처럼 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데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카이로의 아랍 외교 소식통들은 이라크 전쟁 후 새로운 상황에 맞는 지역연합체를 구성하려는 움직임이 일부 아랍국들 사이에서 추진되고 있다고 지난달 31일 밝혔다. 새로운 지역 기구는 기존 아랍연맹을 대체하기 보다는 연맹의 하위 기구가 될가능성이 높다는 설명이다. 이같은 움직임은 아랍권 22개국의 협력체인 아랍연맹이이라크 위기를 효과적으로 해결하지 못해 결국 전쟁을 방조했다는 통렬한 자아 비판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같은 날 사우디 아라비아는 이라크의 무고한 민간인들이 미.영 연합군의 공격에희생되는 현실을 개탄하고 전쟁을 중지시키기 위해 국제사회가 단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우디는 압둘라 빈 압둘 아지즈 왕세자가 주재한 주례 각의 후 "전세계 이슬람 국가들과 평화를 사랑하는 국가 및 국민들이 전쟁을 멈추기 위해 노력할 것"을촉구했다. 미국 지도부로부터 이라크전 개입 의혹을 받고 있는 시리아와 이란도 이웃 형제국인 이라크에 대한 공격을 중지할 것을 공개 요구하고 나섰다. 파루크 알-샤라 시리아 외무장관과 카말 하라지 이란 외무장관은 이라크 상황을논의한 뒤 미국과 영국에 대해 이라크 군사공격을 즉각 중지하라고 요구했다. 양국은 전쟁 종기 종결과 지역 안정을 위해 상호 긴밀히 협력해 나가기로 합의했다. 양국 외무장관의 협의는 콜린 파월 국무장관과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 등 미행정부 고위 관리들이 잇따라 이라크와 시리아의 전쟁 개입 의혹을 제기하며 응분의대가를 경고한데 따른 것이다. 이와함께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도 전쟁 장기화로 인한 역내의 파멸적혼란 가능성을 경고했다. 그는 군 지휘관들과의 모임에서 전쟁이 장기화할 경우 전세계 이슬람 과격세력의 활동이 강화돼 "오사마 빈 라덴과 같은 테러 지도자가 100명으로 늘어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지난달 20일 이라크전 발발 후 아랍 전역에서 거의 매일 반전시위가 벌어졌지만아랍 지도자들은 상황이 조기에 종결될 것이라는 근거없는 낙관으로 방관적 태도를보여왔다. 아랍 민중의 반미 의식이 사상 최고조에 달한 반면 아랍 지도자들의 무기력과기회주의도 가장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아랍 언론들은 지적하고 있다. 이집트의한 중견 언론인은 이번 전쟁에 대한 아랍 지도자들의 태도를 "팔짱끼고 바라보는 정관(靜觀)주의(wait and see)"라고 꼬집었다. 물론 전쟁이 조기에 끝나고 이라크에 `민주적' 정권이 들어선뒤, 전후 복구사업에 참여할수 있다면 지금의 대중 정서도 금방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전쟁이 2달이상 지속되고 경제적 직격탄을 맞은 아랍 민중의 반전 구호과 반정부 구호로 돌변할 경우 역내 어느 정권도 혼자서 상황을 수습하기 어렵다는 위기감이 조성되고 있다. 카이로 대학의 무스타파 카말 알-사이드 교수는 "미국과 이스라엘을 비난하는시위가 무바라크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로 변모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분노가 고조되고 미국에 대한 증오심도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아랍 순교자들이 연합군에 자살 폭탄공격을 가하기 위해 이라크로 떠나는 TV장면은아랍 대중에게 비장한 각오와 단결심을 고취시키기에 충분하다. 야당들은 무바라크 대통령이 이라크 전쟁에 침묵을 지키는 대신 44억달러의 경제지원을 미국에 기대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집트는 부시 행정부의 전쟁 긴급 지원법안에 따라 3억달러의 지원을 약속받은 상태다. 사정이 이러니 아랍 형제의 피를팔아 정권 안보와 경제지원을 보장받으려 한다는 비판을 면키 어려워졌다. 이같은 상황은 이집트에 국한되지 않는다. 미군에 군사기지를 제공하면서도 표면적으로는 전쟁에 반대한다고 외치는 걸프 왕정국가들도 똑같은 근심을 안고있다. 아랍 지도자들은 그 어느때보다 심각한 위기감을 공유하고 있다. 아랍 지도자들이 뒤늦게 전쟁을 빨리 멈춰야 한다고 힘 없는 목소리를 높이는 배경이다. (카이로=연합뉴스) 정광훈 특파원 baraka@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