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룽지(朱鎔基)에 이어 중국의 제6대 총리로선출되며 국무원 최고봉 자리에 올라선 원자바오(溫家寶)는 평민 가정 출신이다. 원자바오 신임 총리는 1942년9월 톈진(天津) 출생으로 조부는 사립학교 교장,부친은 중학교 지리 교사, 모친은 초등학교 국어 교사로 완전 교육자 집안에서 성장했다. 특히 원자바오 총리는 1930년대에 저술된 지질학 서적들을 많이 소장하고 있었던 부친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지질학에 남다른 재능과 관심을 보였다. 그는 1960년 당시 설립된 지 얼마되지 않은 베이징(北京) 지질학원 지질광산과에 입학해 지질측량과 광물탐사 분야를 전공하며 거의 우등을 놓치지 않았다. 베이징 지질학원 지질구조학과 대학원에 재학중이던 원자바오는 1968년2월 문화대혁명의 폭풍이 몰아치면서 간쑤(甘肅)성으로 추방되어 학업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는 간쑤성 지질국에서 지질 분야 전문가로 근무하면서 란저우(蘭州)대학 지질지리학과를 졸업한 지금의 부인 장페이리(張培莉)와 만나 70년대에 결혼을 했다. 원자바오 총리는 비록 중국의 변경지방에서 하찮은 업무를 했지만 업무 능력이뛰어나 상사의 눈에 띄었으며 문화대혁명이 끝난 뒤 지도자의 길을 걷게 된다. 그는 81년 쑨다광(孫大光) 지질광산부장의 천거로 간쑤성 지질국 부국장으로 영전했으며 1982년 지질광산부 정책법규연구실 주임으로 임명되며 중앙에 진출했다. 그는 1983년 41세의 나이로 지질광산부 부부장으로 승진했으며 쑨다광의 추천으로 차오스(喬石) 당 조직부장과 후야오방(胡耀邦) 총서기의 이목을 끌게 된다. 후야오방 총서기는 1985년 부부장급 이상으로 나이가 젊고 학력이 높으며 재능이 있는 간부를 물색해 중앙판공청 주임으로 추천할 것을 당 조직부에 지시했다. 당 조직부는 원자바오와 우방궈(吳邦國) 등 2명을 최종 후보로 추천했으며 당시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원자바오를 당 중앙 판공청 부주임으로 임명했다. 원자바오는 중앙판공청 부주임에 발탁된 이후 거의 귀가도 하지 않고 주말에도사무실에 남아 각종 문건과 서적을 읽으며 업무에 열중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1년 만인 1986년 중앙판공청 주임으로 승진했으며 1987년11월 공산당 제13차 전국대표대회(13大)에서 당 중앙위원과 중앙서기처 후보 서기로 뽑혔다. 그는 이어 14大가 열린 1992년10월 중앙 정치국 후보위원 신분과 함께 중앙서기처 서기를 겸임하게 되면서 재경과 과학기술, 농업, 농촌업무 등을 두루 맡았다. 그는 다음해인 93년3월 쩡칭훙(曾慶紅)에게 중앙판공청 주임 자리를 물려주고경제 전반을 총괄하는 당 재경영도소조와 농촌공작영도소조 부조장으로 옮겼다. 원자바오는 농촌공작영도소조에서 당시 조장을 맡고 있었던 주룽지와 처음 인연을 맺게 됐으며 지금도 주룽지 전임 총리의 측근으로 분류되고 있다. 그는 97년9월 15大에서 정치국 위원 겸 중앙서기처 서기로 올라섰으며 1998년 3월 국무원 부총리와 당 중앙농업영도소조 조장을 맡는 등 출세 가도를 달렸다. 그는 지난해 11월 열린 16大에서 중국의 최고 권력기관인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에 당선되며 공식 권력서열 3위의 자리에 우뚝 올라서게 됐다. 원자바오 총리의 부인은 현재 중국 진주보석검사센터 주임과 함께 교수직을 겸임하고 있어 국제학술회의에 자주 참석하고 있으며 슬하에 1남1녀가 있다. 아들은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베이징에서 벤처기업을 경영하고 있으며딸은 지난 2001년 미국 유학생과 결혼하여 지금 박사과정을 준비하고 있다. (홍콩=연합뉴스) 권영석 특파원 yskwo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