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장관 임명 절차와 사임 절차는 격식을 매우 존중한다. 대통령 당선자는 자신과 함께 일할 장관을 데리고 기자실에 나타나 그의 능력과 인품을 한껏 치켜세운다. 그렇게 임명한 장관들은 자신의 임기(4년) 동안에는 거의 바꾸지 않는다. 4년을 다 채우고 물러나는 장관들에 대한 예우는 선임 때보다도 더 깍듯하다. 김영삼정부 시절 출근하는 차 안에서 졸지에 경질 통보를 받았던 한 경제장관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한 부처를 이끌어온 장관인데 어떻게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없이 전화 한통으로 그만두라고 할 수 있습니까. 미국을 보세요. 떠나는 장관에 대한 대통령의 예우가 얼마나 극진합니까." 그런데 폴 오닐 재무장관은 지난 6일 어이없게 경질됐다. 오닐에게 경질통보를 한 사람은 딕 체니 부통령이었다. 체니는 전날 오후 오닐에게 전화를 걸어 '이제 떠날 때가 됐다'는 백악관 내부의 결정을 통보했다. 경제팀 교체설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듯했던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경질 통보를 받은 오닐은 다음날 아침 8시38분 비서실장에게 3문장으로 된 이임사를 남긴채 재무부를 떠났다. 그는 곧바로 고향인 피츠버그로 가버렸다. 백악관은 그날 오후 오닐 장관의 사임을 공식 발표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기습적인 경질에 화가 난 오닐 장관이 아침 일찍 떠나버리는 바람에 오전 9시40분쯤 사임 사실이 긴급 뉴스로 타전됐다. 오닐 장관과 동반 사임한 로렌스 린지 백악관 경제보좌관도 지난 5일 폭설로 인해 집에 갇혀 있다가 앤드류 카드 대통령 비서실장으로부터 경질통보를 전해들었다. 대변인이 대신 읽은 대통령의 송사도 형식적이었다. 2년동안 같이 일한데 대한 예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미국의 전통적인 '장관 존중' 풍토와는 딴판이었다. 한국의 잦은 개각과, 야멸찬 장관 버리기를 비판할 때마다 대비시키곤 했던 미국이 아니었다. 조지 부시 대통령이 오닐 장관을 내치는 모습에서 몇 안되는 '미국으로부터의 배울거리'가 없어졌다는 것을 느꼈다. 워싱턴=고광철 특파원 gw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