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는 화려한 언변과 남자다운 용모로 '미디어 총리'로도 불리지만 과감한 정치적 변신을 시도하고 강한 승부사적 기질을 발휘하는 정치인으로 평가를 받는다. 이번 총선에서도 그는 승부사적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경제침체와 400만명이 넘는 실업자 때문에 올들어 총선 여론 조사에서 사민당이 기독연합에 계속 밀리던 상황에서 100여년 만의 대홍수라는 국가적 재난을 맞아 현직 총리가 야당 후보에 비해 유리한 점을 최대한 활용했다. 특히 선거전 막판 미국의 `이라크 공격 반대'를 내세워 유권자들의 눈길을 경제문제에서 독일의 `독자 외교노선'으로 돌려놓음으로써 당의 지지율을 급속히 끌어올리는데 성공했다. 22일 총선에서 그가 이끄는 사민당은 기민당에 뒤진 것으로 출구 여론조사 결과에서 나타났다. 패배의 가장 큰 원인은 슈뢰더 총리 집권 기간의 경제난이다. 그러나 녹색당의 선전으로 적녹연정이 유지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올해 6월말가지만 해도 재집권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였다. 그러나 이를 역전시킨 것은 여러 여건이 맞았기 때문이지만 슈뢰더 총리의 과감한 승부수가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물론 최종 집계 결과 사민당의 재집권이 어려워지면 선거 패배 책임을 져야 할 슈뢰더 총리의 당내 입지는 크게 위축할 수 있다. 반면 재집권에 성공할 경우 재선총리로서 독일 정계에서 비중이 더 커질 것이다. 슈뢰더 총리는 지난 98년 총선에서 16년 간이나 총리를 지낸 거목 헬무트 콜 의원을 물리치고 사상 최초로 선거를 통해 정권교체를 이루며 유럽의 '신세대 정치인'으로 떠올랐다. 당시 슈뢰더 총리가 오스카 라퐁텐 당수를 제치고 사민당 총리 후보가 된 것은 선거 승리를 위해 대중적 이미지가 좋은 그를 당의 '이미지 상품'으로 내세우는 편이 유리하다는 당내 여론 때문이었다. 그러나 슈뢰더 총리는 집권 후 정통 사회민주주의 노선에서 탈피해 친기업적 색채가 강한 정책을 폈다. 그는 자신의 정책노선이 영국 토니 블레어 총리가 주창한 '제3의 길'과 유사한 '신중도(新中道)'라고 포장하기도 했으나 이에 반발하던 라퐁텐이 결국 당을 떠나야 했다. 슈뢰더 총리는 또 연립정부 내 좌파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의 일원으로 코소보 공습에 참여키로 결정해 제2차 대전 이후 처음으로 독일군을 해외 전투에 파병시켰다. 그러면서도 우파가 격렬히 반대하는 국적법 개정을 강력히 추진해 독일인 혈통이 아니더라도 이민자와 그 자녀들이 독일 국적을 가질수 있도록 하기도 했다. 그의 이 같은 과감한 변신능력과 승부사 기질은 어려운 성장기를 거치며 입신양명에 성공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으로 분석된다. 그는 나치 병사였던 아버지가 루마니아에서 전사한 뒤 편모슬하에서 4형제와 함께 가난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17세부터 상점 견습생으로 일하며 야간학교를 다닌 그는 괴팅엔대학 법대에 입학한데 이어 76년 변호사 자격증을 따냈다. 야간학교 시절인 63년에 이미 사민당에 가입한 그는 정열적인 활동력과 뛰어난 화술로 78년 사민당 청년조직 의장이 됐다. 급진 좌파를 자처하고 한때 적군파를 옹호하기도 했던 그는 80년 연방 하원의원,86년 니더작센 주의회 원내총무, 90년 주총리 등을 거치며 정통 좌파 이념에서 탈피해 사민당 내 온건파 지도자로 부상했다. 집권 뒤엔 우파에 가까운 정책을 편다는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사민주의 노선을 버리지 않으면서변화한 현실을 수용하는 자세"라며 옹호하기도 했다. (베를린=연합뉴스) 최병국 특파원 choibg@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