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2년 간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할 과도정부의 수반으로 재선출된 하미드 카르자이 현 수반(44)은 혼돈과 폐허 속에 빠진 아프간을 안정과 재건으로 이끌어갈 걸출한 지도자로 부상한 카리스마적인 인물이다. 지난해말 아프간에서 탈레반 정권이 붕괴되고 독일 본에서 6개월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정파회의가 열리기 직전까지만 해도 카르자이가 수반이 되리라는 관측은 그리 많지 않았다. 본 회의에서 그가 미국의 강력한 지원 아래 수반으로 선출된 이후에도 모하마드 카심 파힘 국방장관과 유누스 카누니 내무, 압둘라 압둘라 외무장관 등 북부동맹 세력이 권력핵심을 장악하고 그는 단지 얼굴마담으로 앉혀졌다는 분석이 많았다. 부르하누딘 랍바니 전대통령이 와신상담하며 권력복귀를 노리는 가운데 자히르샤 전국왕이 부족대표회의(로야 지르가)에서 국가 수반이 될 것이란 관측도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아프간 내 최대 종족인 파슈툰족 출신이라는 것 외에는 별다른 권력기반도 없는 그는 지난 6개월간 임시정부 수반직을 수행하면서 누구도 넘보기 어려운 탁월한 지도자임을 국내외에 입증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지역과 종족을 달리하는 수많은 군벌들은 이번 회의에서 카르자이 수반을 압도적으로 지지했고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후원 역시 강력했다. 샤 전국왕이나 랍바니 전대통령에 대한 지지세력도 일부 있었지만 카르자이를 넘보기에는 어림없는 수준이었다. 칸다하르주의 포팔자이족 출신인 카르자이는 카불에서 학교를 다닌뒤 인도로 유학해 대학을 마쳤다. 포팔자이족은 18세기 중반부터 1973년 자히르 샤 전 국왕 축출때까지 아프간을 통치한 왕족이 속한 부족으로 카르자이는 1999년 부친의 피살 이후이 부족의 족장이 됐다. 인도에서 돌아온 뒤인 1980년대에 그는 옛 소련군의 침공에 맞선 무장투쟁에 나섰으며 파키스탄의 페샤와르에서 망명생활을 해야 했다. 소련군이 아프간에서 물러가자 무자헤딘(이슬람 전사)의 지원 아래 수립된 정권에서 1992년 외무차관을 지낸게 과거 그의 공직 경력의 전부였다. 탈레반 정권 초기엔 칸다하르 출신인 그도 탈레반에 대해 호의적인 입장이었다. 1996년엔 탈레반 정권으로부터 유엔 주재 대사직을 제의받을 정도로 관계가 좋았으나 아랍계 이슬람교도들의 득세에 염증을 느낀 그는 이 제의를 거부함으로써 탈레반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99년 부친이 탈레반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의문의 암살을 당한 뒤부터는 본격적인 반탈레반 활동에 나섰다. 지난해 10월 미국의 아프간 공습이 시작되자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아프간 남부로 들어가 반탈레반 세력 규합 활동을 펼쳤으며 탈레반 정권의 마지막 붕괴에 커다란 역할을 해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본 정파회의에서 일약 임시정부의 수반에 선출된 이후 그는 원색의 아프간 전통복장으로 국제 무대를 누비며 수 십 억달러의 재건 원조를 받아내는 뛰어난 외교적 수완을 발휘했다. 국내 정치에서도 권력배분을 놓고 치열한 각축을 벌이는 군벌들의 이해관계를 막후에서 조정, 타협의 명수라는 칭호까지 등장했다. 그러나 그에게 별다른 군사적 배경이 없다는 점과 미국의 절대적인 지원을 받는 친미주의자로 각인된 이미지는 여전히 그가 극복해야 할 과제로 지적되고 있다. (카이로=연합뉴스) 이기창 특파원 lkc@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