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말과 20세기초 미국과의 전쟁에서 현재의 캘리포니아와 텍사스, 애리조나, 뉴멕시코, 콜로라도주 등 광대한 영토를 잃은 멕시코인들은 기본적으로 미국인들을 `그링고'라고 부르며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링고란 전쟁당시 녹색 군복을 입었던 미국 군인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양키 고 홈'하듯이 멕시코인들도 `Green Go(미국 군인은 멕시코땅에서 물러나라)'를 외쳤다가 이 말이 나중에 멕시코에서는 미국인을 상징하는 말이 됐다. 물론 경제적으로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가입이후 멕시코는 수출입의 85% 이상을 미국시장에 의존하고 있으나 이러한 역사적 배경때문에 정신적으로는 항상 미국을 `극복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 월드컵 D조 예선 한-미전을 지켜본 멕시코 언론은 따라서 은근히 미국이 지기를 바라면서 한국팀을 응원하는 분위기였다. 11일자 레포르마와 노베다데스, 엘 우니베르살 등 현지 유력 일간지들은 "붉은악마 등 한국인들의 거국적인 응원과 더불어 한.미전은 매우 훌륭했다"며 "바로 이런 경기를 축구팬들은 월드컵을 통해 볼 수 있기를 원한다"고 보도했다. 신문들은 또 "월드컵 개최전까지만 해도 한.미전이 축구팬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경기가 되리라고는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며 "한국 축구는 짧은 기간안에 놀라운 성장을 기록, 멋진 경기를 보여주었다"고 전했다. 신문과 마찬가지로 TV와 라디오 방송도 한.미전 결과를 보도하면서 한국이 월등한 경기를 펼치고도 미국과 무승부를 기록한 것에 대해 아쉽다는 반응을 보였다. 각 TV방송의 월드컵 특집방송 진행자와 축구해설가들은 한.미전 경기내용을 재방영할 때마다 황선홍선수가 부상으로 실려나간 직후 미국의 매티스가 선제골를 기록하는 순간마다 "에-이"라는 못마땅한 반응과 함께 한국팀을 두둔하는 듯한 모습이 역력했다. 또 후반들어 한국의 안정환이 헤딩슛으로 동점골을 만들어낼 때 한국의 거스 히팅크 감독이 환호하는 장면과 미국의 브루스 어리나 감독이 주먹을 불끈쥐며 마치 '있어서는 안될 일'이 일어나기라도 한 듯한 표정을 짓는 장면을 대비시키며 미국인들의 오만한 모습을 은근히 비난하기도 했다. 어쨌든 미국을 썩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멕시코 언론은 한국이 훨씬 유리한 경기를 펼치고도 미국인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주지 못하고 1-1 무승부를 기록한 것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한-포르투갈전과 폴란드-미국전 등 다음 경기에 기대를 걸고 있다. (멕시코시티=연합뉴스) 성기준특파원 bigpe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