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호 빅토르 위고(1802-1885)의 탄생 200주년을 맞은 프랑스에서는 위고의 탄생일을 하루 앞둔 25일 다채로운 전야제 행사로 분주했다. 레미제라블, 노트르담의 곱추 등 수많은 명작을 남겼던 위고는 1802년2월26일 프랑스 동부 브장송에서 태어났다. 대문호의 고향 브장송에서는 그의 탄생 전야인 25일 정계와 문화계 거물급 인사들이 회동, 대혁명 이후 프랑스의 발전을 위한 길잡이 역할을 하는데 헌신해온 위고를 기리는 행사를 갖는다. 그의 탄신일인 26일에는 상원의원들이 위고가 20년간 망명생활을 했던 채널 제도(諸島)를 방문할 예정이다. 크리스티앵 퐁슬레 상원의장은 "위고는 숙명론과 맞서 진보를 위해 투쟁하면서 휴머니티의 완전성을 구현한 독보적인 인물"이라고 대문호를 칭송했다. 대통령 선거전에 나선 리오넬 조스팽 총리는 위고가 1855년 `유럽 합중국'에 관한 저작물에서 예견했던 유럽단일 통화 구상이 150년만에 실현된 점을 의식, "위고가 우리에게 남긴 평화와 단합의 메시지는 유럽 통합 프로젝트를 지속적으로 추진시켜나가는 역할을 해야 한다" 고 강조했다. 유력인사들의 헌사와 별도로 각 신문과 TV는 상당한 지면과 시간을 할애, 위고의 생애와 작품을 기리고 있으며 수십권의 관련 서적도 출판된다. 위고의 생애와 작품이 지니는 폭과 깊이, 그리고 열광적인 에너지는 그를 `대양(大洋)과 같은 인물'로 불리게 했다. 위고가 일생동안 남긴 업적은 대혁명의 전통속에 간직되어온 자유의 원칙을 형상화하고 생명력을 불어넣은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교육부의 빅토르 위고 과학위원회 의장인 자크 세바셰 파리대학 명예교수는 르몽드와의 회견에서 "위고는 혁명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체제의 근본적인 변화를 옹호했던 인물이며 특히 이 변화가 민주적인 방식으로 이뤄지는 것을 지지했다"고 평가했다. 작가, 시인인 동시에 걸출한 논객이며 정치인이었던 위고는 혁명의 전쟁으로 인한 피로 물든 폐허에서 자유와 평등, 우애의 정신을 회복시킨 인물로, 1985년 그의 서거 100주년 행사 이후에는 동시대의 상징적인 인물로 추앙받아왔다. 고난의 시대에 문학적 양심인 동시에 혁명의 영웅이었던 위고는 서거 후 수백만명의 군중들의 애도속에 공화국의 성전으로 위인들의 유해가 모셔진 팡테옹에 안장됐다. 이후 그의 이름은 민주주의의 수호자, 자유로운 공교육의 옹호자, 사형제의 폐지와 유럽통합의 주창자와 동일시됐다. 그러나 위고에 대한 맹목적인 칭송은 자칫 그가 일생동안 수행해온 투쟁이 모두 종결된 것으로 간주하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위고의 전기작가인 장-마르크 오바스는 "위고가 그린 미래상은 우리의 현재가 됐다"면서 "우리는 사형제를 폐지하고 유럽단일 통화제도를 포함한 유럽통합을 이뤄내고 대부분의 서구지역에 민주적인 공화국 정부를 수립했으며 여러가지 측면에서 볼 때 위고가 예견했던 것들의 끝지점에 바로 우리가 위치하고 있다"고 말했다. 오바스는 "위고의 탄생 200주년을 맞아 준비된 축하행사는 토론의 종결을 가져오는 듯 하다"면서 "안이한 동의와 만족, 그에 따른 논리적 귀결인 무관심, 바로 이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파리 AFP=연합뉴스) shpark@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