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히토(明仁) 일왕이 지난 9.11 미국 동시다발 테러 당시 시종장(侍從長)을 통해 주일 미국대사관에 조의(弔意)를 전한 사실이 26일 밝혀졌다. 이런 행위는 "천황은 헌법이 정하는 국사(國事)에 관한 행위만 하고, 국정(國政)에 관한 기능을 갖지 않는다"는 현행 일본 헌법 제7조를 위반했으며 사실상 국가원수가 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적지 않은 파장을 예고한다. 이같은 사실은 68회 생일을 앞둔 지난 23일 아키히토 일왕이 일본 국내 언론과 가진 기자회견에서 한 기자의 질문에 답을 하면서 공개됐다. 연합뉴스가 마이니치(每日)신문을 비롯해 일본 언론에 공개된 기자회견 전문을 분석한 결과 기자회견 네번 째 질문을 통해 아키히토 일왕이 9.11 테러에 대한 조의를 전달한 사실이 밝혀졌다. 이 질문에서 기자는 "미국 동시다발 테러에는 폐하가 시종장을 통해 주일 미대시관에 조의를 전달하셨습니다. 자연재해 이외의 조의전달은 이례적이고, 궁내청에서도 대응을 신중히 검토했다고 들었습니다만, 최근 폐하의 흉중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일왕은 "조의전달은 이례적인 일이지만 이러한 사건은 과거에도 없었고, 그 사건 자체가 이례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라면서 조의전달 사실을 확인했다. 그러면서 그는 "황실이 전례를 중히 여기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각 시대에 전례가 없는 일이 더해진다는 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이번은 이에 기초해시종장을 통해 주일 미대사관에 조의를 전달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이처럼 일왕이 9.11 테러와 관련해 조의를 미국에 전달했다는 사실은 국내는 물론이고 일본에서도 전혀 공개되지 않고 있었다. 국내 언론은 일본 간무(桓武) 천황의 모가 백제계였다는 일왕의 언급에만 초점을 맞추어 보도했다. 일본 근대 천황제 연구가인 서강대 박환무 강사는 "회견 내용을 보아 일본 언론 또한 일왕의 조의전달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보도를 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일본 헌법 제7조에 따라 일왕의 국사행위는 '내각의 조언과 승인이 있어야 하고 내각이 그 책임을 진다'고 규정하고 있고 일왕은 국가원수가 아니라 상징임에도 미국 정부에 조의를 전달한 것은 사실상 국가원수에 해당하는 국사행위"라면서 "이는 헌법 위반이다"라고 지적했다. 박 강사는 이와 더불어 9.11 테러 조의전달은 물론이고 지난 23일 기자회견 또한 일왕이 단순한 국가상징이 아니라 사실상의 국가원수로 대두되고 있는 흐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점에서 지난 25일자 마이니치신문이 '천황에도 국가대표의 기능'라는 사설을 통해 왕을 국가원수로 삼도록 헌법개정을 하자는 요지를 들고 나온 사실은 주목된다. 일본 정부는 지난 88년 히로히토(裕仁) 왕이 죽었을 때 영국의 한 일간지가 히로히토가 전범임에도 처벌받지 않았다고 보도하자 지바카즈오(千葉一夫) 당시 주영일본대사를 통해 "일본국 원수인 천황폐하"라며 항의하기도 했고 요즘 국가원수가갖는 역할 일부를 왕이 행사하게 하는 등 왕을 국가원수로 삼으려는 움직임을 노골화하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taeshik@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