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아랍국가들이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격에 굳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 미국과 노골적인 적대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이라크이외에는 아랍국가들 중 미국의 공격에 대한 뚜렷한 찬반입장을 밝힌 나라가 없는상황이다. 이집트의 유력 신문과 방송들은 8일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격 사실을 아무런논평 없이 보도했다.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은 물론 이집트 정부 관리들도 미국의공격에 대한 어떤 언급도 내놓지 않고 있다. 무바라크 대통령의 정치담당 보좌관이 기자들의 질문에 마지못해 미국이 만일 '결정적인 증거를 가지고 있다면' 아프간을 공격할 권리가 있다고 말한 게 전부이다.이 보좌관은 이런 조심스런 논평을 하면서도 "이집트는 아프간 국민들의 고난을 우려하고 있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요르단도 이날 뒤늦게 자국은 국제 반테러운동을 지지하지만 무고한 아프간 시민들이 피해를 입어서는 안된다는 어정쩡한 입장을 밝혔다. 미 5함대가 주둔하고 있는 바레인 역시 "테러리스트들에 맞서기 위한 국제사회의 행동을 지지하지만 아프간의 이슬람 형제들이 그들의 의지를 벗어난 일에 대한 결과를 감수해서는 안된다"고논평했다. 아랍권의 중추국가인 사우디 아라비아는 아예 논평을 내놓지 않고 있다. 사우디군대는 비상경계에 들어가지 않았으며 항공 운항도 정상이라는 당국자들의 발표가있었을 뿐이다. 아랍국가들의 이같은 침묵은 이 나라들의 정부가 처한 미묘한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분석된다. 대부분 미국의 막대한 군사 정치적 지원을 받고 있는 아랍국가들이미국의 공격에 반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고 국민들의 들끓는 반미감정을 외면하고 미국 편을 들었다간 정권 자체가 흔들릴 판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아랍권의 맹주를 자처하는 이집트의 경우 매년 미국으로부터 20억달러 안팎의원조를 받고 있다. 또 무바라크 대통령 정부의 최대 위협 역시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으로 꼽힌다. 따라서 이집트는 이슬람근본주의 세력이 주도하는 테러와의 전쟁을적극 지지할 법도 하지만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러지 못하고 있다. 들끓는 국민여론과 이슬람형제국가들의 반미감정을 거스르기 어렵기 때문이다. 요르단의 압둘라 2세 국왕 정부 역시 미국의 맹방이지만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라크와 이스라엘, 팔레스타인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다. 첨예하게 다른 이웃들의 틈바구니에서 미국의 공격에 찬반을 밝히기란 어려운 일이다. 사우디 아라비아는 지난 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때 미군의 주둔을 처음으로 허용했다. 외세가 사우디 영토 안에 주둔하는 것은 이슬람 율법(샤리아)에 어긋나는 일이지만 90년도에는 미국의 개입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아프가니스탄은 이슬람 형제국임에 틀림없으며 이런 나라에 대한 공격을 지원할수 없다는게 사우디 정부의 분명한 입장이다. 이처럼 미국의 아프간 공격에 애써 거리를 유지하려는 아랍국가 지도자들이 몹시 우려하는 건 장기전이다. 미국이 오사마 빈 라덴을 단시일내에 잡아내지 못하고아랍권의 라덴 지지열기가 갈수록 확산될 경우 아랍 지도자들의 입장은 더욱 난처해질 수 있다. 특히 다음달 15-16일께 시작되는 라마단(이슬람 금식월) 이전까지 라덴을 잡아내지 못하고 이슬람 성월인 라마단 기간까지 미국의 공격이 이어질 경우 아랍권의 라덴 지지열기와 반미감정은 더욱 치솟을 것이란 전망이다. (카이로=연합뉴스) 이기창특파원 lkc@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