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레반도, 북부동맹도, 자히르국왕도 모두 다 싫다" 미국을 향한 증오와 항전의지로 가득찬 것처럼만 보이던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접경 난민촌 분위기가 확연히 변해 가고 있다. 3일 이슬라마바드에서 외곽으로 한참 달려 도착한 `아프간 콜로니' 난민캠프. 북서변경주(NMFP) 소재 난민촌과는 달리 정착 난민들이 많은 이 곳 사람들이 겁내는 것은 전쟁이나 굶주림이 아니다. 카불에서 몇 달 전 왔다는 무빈(20)씨는 파키스탄 무장경찰이 가장 무섭다고 한다. 이날 아침에도 마을 사람 10여명이 특별한 이유없이 경찰에 끌려갔다고 전했다. 취업이 금지된 이 곳 사람들이 어디로 끌려가서 무슨 고초를 당하고 돌아오는지 아무도 설명하려 들지 않았다. 마을 어른 격으로 보이는 랄 모하메드(44)씨는 "경찰에 `돈을 먹여야' 그나마 살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경찰이 어차피 불법 체류자인 이들을 협박해 등을 쳐먹는다는 얘기다. 한마디로 벼룩의 간을 내어 먹는 꼴이다. 전기도 하수도도 없이 온갖 오물이 뒤섞여 잠깐 인터뷰하는 동안에도 파리 떼가 쉴새없이 달라붙는 이 곳에 전혀 예상치 못한 부패의 사슬이 존재하고 있었다. `I-11 섹터'라는 낡은 표지가 있는 뿌연 흙담집 골목 사이에 서 있던 하산(18)군은 '전쟁이 나면 무자헤딘이 될 거냐'는 질문에 "우리가 왜 싸워야 하나"고 되물었다. 아프간 북동부 잘랄라바드에서 가족과 함께 넘어 왔다는 그는 "탈레반이 싫다"고 잘라 말했다. 그럼 북부동맹(NA)을 지지하느냐고 했더니 "그들은 더 싫다"고 한다. `그렇다면 자히르 전 국왕은' 하고 묻자 아예 대답조차 않았다. 이들에게서 지지세력을 찾을 수는 없지만 반 탈레반 정서가 강하게 퍼져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2일 오후 페샤와르에서 서쪽으로 30㎞ 쯤 떨어진 `샴사투' 난민촌. 9.11 테러사태 이후 6만여명이 새로 도착했다는 이 곳에서도 반응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움푹패인 눈빛이 예사롭지 않아 보이는 압둘 마지르(35)씨는 "오사마.. 우리와 그가 무슨 상관이냐. 나는 모른다"고 거친 목소리를 내뱉었다. 북쪽 카두스 지방 출신이라는 그는 "내전이 더 지긋지긋했다"며 고향을 등지고 온 이유를 설명했다. 아프간에 과수원도 있었지만 물을 대지 못해 다 말라 붙었다면서 가족 일부가 남아 농장을 지키고 있다고 말했다. 언젠가는 돌아가겠다는 말도 덧붙였지만 탈레반을 위해 싸우겠다는 뜻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하얀 턱수염을 기른 파이잘 씨는 "지하드는 끝났다. 더이상 어디로 갈 데가 있나"고 반문했다. 샴샤투 캠프는 비교적 안전한 난민촌으로 분류되는 지역이기 때문에 반미정서가 약할 수도 있다고 동행한 현지인은 말했다. 5만여명이 살고 있고 가장 반미성향이 강하다는 인근 `젤로자이' 캠프는 외국 취재진의 접근이 금지됐다. 하지만 그 곳에서도 지하드를 지지하는 목소리가 예전같지는 않다는 게 현지소식통의 설명이다. 아프간 북동부와 파키스탄 북서변경주에 사는 같은 종족인 `파슈툰'은 호전적인 전사기질로 유명하다. 파키스탄 북서부 `부족 자치구역(tribal agency)'은 파키스탄당국이 포기한 지역으로 치안력이 전혀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이들도 황폐한 삶 때문에 지칠대로 지쳤고 이제 싸울 힘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아 보였다. 현지 소식통은 "전쟁이 나면 대다수의 난민촌 젊은이들이 무자헤딘으로 변신해 항전에 나설 것이라는 관측은 오산일 지 모른다"고 말했다. (이슬라마바드.페샤와르=연합뉴스) 옥철특파원 oakchul@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