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의 최고 의사결정 기구인 국민협의회(MPR)가 23일 대통령 탄핵안 처리에 돌입함에 따라 사상 처음으로 민주적 절차에 의해 집권한 압두라만 와히드 대통령의 정치생명이 경각에 달렸다. 이날 오전 전격 개최된 MPR 특별총회에서 각 정파가 탄핵안을 발의하고 있는 가운데 그는 불명예 퇴진을 목전에 둔 상황에 직면했다. 메가와티 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대통령에 취임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에 앞서 군과 경찰, 사법부 등 권력기관이 모두 등을 돌린데다 믿었던 내각핵심각료들도 반기를 들었다. 메가와티 부통령의 대통령 취임은 사실상 '선서'만 남겨둔 상황이다. 안팎에서 압력에 시달렸던 21개월 간의 짧은 통치기간은 오욕으로만남게 됐다. 탄핵절차 상으로는 MPR에서 해명연설을 할 기회가 부여될 수 있지만 와히드가이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곧바로 대통령 직무가 정지되고 메가와티 부통령이 자동으로 권력을 승계하는 것이다. 추앙받는 이슬람 종교 지도자로서 정치 전면에 화려하게 등장한 그는 99년 10월 메가와티 수카르 노푸트리 부통령을 제치고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만 해도 거칠 것 없는 개혁의 기수였다. 와히드는 취임직후 곧바로 수하르토 전 대통령 일가의 부패혐의에 대한 조사에 착수하고, 이듬해초 동티모르 유혈사태의 책임을 물어 위란토 장군의 사임을 받아내면서 주가를 드높였다. 4천만명의 회원을 거느린 최대 이슬람단체 나드라툴 울라마(NU)의 굳건한 지지를 등에 업고 실시한 일련의 민주화 정책과 소탈한 대외 이미지는 국민들로부터 비교적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대통령궁 전속 안마사가 조달청 공금 350억루피아(한화 약 44억원)을 횡령한 '블록 게이트'와 볼키아 브루나이 국왕에게 받은 기부금 200만달러를 챙긴 이른바 '브루나이 게이트'가 불거지면서 부터 와히드는 몰락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지난해 6월부터 의회의 소환을 받기 시작했고 급기야 올 1월 국회 특별진상조사특위가 2건의 금융스캔들에 와히드 대통령이 연루된 것으로 잠정 결론을 내렸다. 지난 2월부터는 탄핵절차 개시를 위한 수순밟기가 시작됐다. 국회가 1.2차 해명요구서를 발송한 뒤 와히드측의 해명을 거부함으로써 사실상 탄핵을 기정사실화하기 시작한 것. 여기다 뇌일혈로 시력을 거의 상실한 건강상의 약점과 아체.이리안자야 등 분규지역 사태해결 실패, 경제난 가중 등 국정운영의 미숙과 실정이 이어지고 잦은 해외순방으로 국정을 도외시한다는 비판까지 일면서 민심은 급격히 이반하기 시작했고 그의 정치적 기반 역시 순식간에 와해되기 시작했다. 물론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 극적인 카드를 여러차례 제시하기도 했으나 그때마다 좌절에 부딪히고 말았다. 대표적인 실패가 메가와티 부통령의 지지를 잃어버린 것. 메가와티는 국회 조사결과 발표 당시만 해도 탄핵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보였으나 국정권한의 일부를 이양받고도 와히드측의 지속적인 견제를 받자 결국 등을 돌리고 말았다. 와히드는 지난 5월 국회해산을 기도하다 좌절되자 메가와티에게 권력분점안을 제의했으나 거절당하고 만다. 이후 군부와 경찰의 이탈은 급속도로 진행됐다. 수로조 비만토로 경찰청장이 사임을 거부한 채 경찰내 집단항명을 주도했으며, 군부는 비상사태 선포명령을 따르지 않겠다며 지난달부터 사실상 항명상태에 들어갔다. 그의 가장 유력한 측근인 바하루딘 로파 검찰총장이 지난 3일 급사한 것도 결정적인 악재로 작용했다. 집단항명을 주도한 경찰청장을 전격 해임하고 군 수뇌부 교체설을 흘리는 등 갖은 수단을 동원해 봤지만 이미 시점을 놓쳐 버렸다. 반대파인 골카르당 부총재를 요직에 입각시키는 등 내각을 전면 개편하고 각계 정파 지도자들과 회동을 제의하는 등 탄핵상황만은 모면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봤지만 모든 게 허사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와히드는 23일 마르주치 다루스만 내각담당 비서와 굼멜라르 정치.사회.안보 조정장관이 등을 돌림으로써 사실상 손발을 모두 잃었다. 그의 오랜 후원자였던 나들라툴 울라마 회원 수천여명이 자발적으로 자카르타에집결, 탄핵반대 시위를 벌일 계획이지만 대세를 되돌리는 수단이 될 가능성은 극히 불투명하다. 이미 그가 쓸 수 있는 정치적 카드는 다 써버린 상황이기 때문이다. (자카르타=연합뉴스) 황대일특파원 hadi@yonhapnews.co.kr